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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더 쓸 일 없을 것 같아서 방생하는 조각글.... 울덷 싸우는게 보고싶었음.
발톱 세우고 사는 삶이 달가울리야 없다.
시도때도 없이 불시에 습격해오는 악몽들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땀에 흠뻑 절어 깨어나면 손등을 찢고 나온 아다만티움 칼날이 달빛을 반사해 번뜩였다. 몸에 잔류한 떨림을 간신히 잠재우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아직 이른 새벽이다. 잠에 든지 고작 2시간 지났는데 벌써 깨어나 무얼 어쩔 셈이냐 비웃는 시계초침 째깍이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린다.
로건은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 못드는 밤에 신물났다. 이런 밤이면 보통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산책 또는 술.
일반적으로 로건은 두 가지 모두를 택했다. 겉옷을 걸쳐입고 나와 목적없이 걷다가 적당히 후줄근한 술집을 발견하면 발을 들였다. 새벽공기 무르익은 시간에 술집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구면이라서 이미 자리잡고 있던 무리가 낯선 남자의 등장에 흥미를 가진다. 로건은 사람들의 관심이 제게 쏠리는 상황에 이골났고 자신이 원치 않게 여러 부류의 인간상을 끌어당기는 걸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싸움꾼.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우월한 수컷을 알아본 얼간이들이 제 여자 앞에서 어깨를 부풀리고 다가와 그에게 시비걸었다. 로건은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타입이다. 기껏해야 왈패밖에 되지 못한 이를 상대하기 위해 무기를 꺼내고 정체를 밝힐 필요도 없다. 햇병아리들을 가볍게 주물러주고 평온하게 잔을 기울이다보면 자존심에 치명상 입은 남자가 무리를 우르르 이끌고 돌아와 로건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그들 또한 뻔히 예상되는 결말을 맞는다. 이건 그에게 준비운동조차 되지 못하는 싸움이다.
용기있는 여성이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다. 저도 한잔 줄래요? 로건은 여자를 힐끗 보고 무심히 말한다. 난 말동무 필요 없어. 여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저도 말 많은 남자는 별로라. 어때요? 저는 그쪽을 더 깊이 알고 싶은데. 근육이 멋지게 자리잡은 허벅지를 은근히 더듬는 손짓이 노골적이다. 묘한 눈빛이 오간다. 그는 유혹을 마다하는 타입 또한 아니다.
그러나 오늘 밤은 그중 어떤 것도 내키지 않는다. 로건은 다만 냉장고에서 술을 하나 더 꺼내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다.
술은 약간의 도움을 주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진 못했다. 죽지 못하는 몸뚱이는 맘껏 취하지도 않았다. 깊은 잠에 빠져본 게 얼마나 됐더라. 가물가물하다. 웨이드 윌슨과의 마지막 싸움 이후로는 기억에 없다.
여자를 안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통제를 잃은 몸뚱이가 무자비하게 무기를 휘둘러 이름 모를 여자의 피를 묻히고 만 날부터 그짓도 관뒀다. 타인의 온기는 그를 안정시켜준다. 그러나 어느 누가 기꺼이 그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품을 내어줄까. 하루는 다정한 연인처럼 굴다가 다음 날엔 자신의 심장을 꿰뚫을지도 모르는 남자를.
로건을 술병을 기울였다. 도수 높은 알코올이 식도를 태우고 혈관을 홧홧하게 데웠다. 깊은 한숨은 나른함에 가깝다. 그는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묻었다. 뇌가 뭉그러진 편이 낫다. 남자의 삶은 전쟁통이나 다름없어 미치기 싫다면 술로 나를 적셔야 했다. 악몽과 목소리, 긴 세월 로건을 괴롭힌 것들은 그의 삶에 눌러붙어 쉬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지치고 피로한 남자는 이따금 신을 찾았다.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바라지도 않은 불사의 삶을 당신의 손으로 거둬가든가 아니면 이젠 날 좀 내버려 둬. 아직도 부족해? 난 충분히 괴로웠어. 한번쯤은 나도 가져봐도 되잖아. 여태 바라지 않은 삶을.
평범한 사람의 행복을.
단 한번도 제게 대답해주지 않는 신을 야멸차게 비웃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
그리고 로건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눈을 떴다.
잠에서 깬 남자는 자신이 느끼는 통증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몸 안쪽에서부터 비롯된 고통에 신음하며 통각이 시작되는 부위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차가운 금속이 살갗을 뚫고 갈비뼈 틈새를 비집었고, 피가 흘러 손바닥까지 척척했다. 그래, 적어도 망상병이 도진 건 아니군. 로건은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통에 박힌 칼날을 움켜쥐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이 덜 깬 희뿌연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그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달빛을 등지고 선 불청객을 노려봤다.
“좋은 아침이야 피넛. 나쁜 꿈이라도 꿨나봐?”
눈에 익은 윤곽과 귀에 익은 목소리, 낯설지 않은 체향이 로건의 감각을 꺠웠다. 서서히 어둠에 적응된 눈이 침입자를 알아봤다―염병할 웨이드 윌슨!
“웨이드, 씨발 이게 무슨 짓이야!”
“정신이 번쩍 들지?”
그렇게 말하며 웨이드는 로건의 몸에 꽂힌 칼을 느리게 비틀었다. 피비린내가 훅 올라왔다. 내장에서 차오른 피가 목 안쪽에서 끓었다. 로건은 핏물을 삼키며 턱을 악물었다. 도대체 왜 이러냐고 묻고 싶었다. 믿을 수 없어서, 그가 자신을 공격할 이유가 없어서, 직전까지 그에게 평온함이 무엇인지 알려준 자가 이런 짓을 벌인 연유를 알아야 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경계가 풀어지고 느슨해지는 날만을 기다렸을까? 누구의 사주를 받고 벌인 짓일까. 이정도 공격에 자신이 죽지 않을 걸 알면서 멍청한 짓을 하고만 이유는 무엇인지.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로건은 확인해야 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남자가 뒤집어쓴 마스크를 확 벗겨냈다. 눈앞의 것이 환각인지 아닌지 알아내고자, 그리고 웨이드가 자신이 아는 진짜 ‘웨이드’인지 확인하고자. 그가 사는 세상에는 괴이한 능력을 지닌 초인들이 많은데 그 중에 정신지배로 타인을 조종하거나 남의 얼굴을 베껴내는 놈들이 너무 많아 손으로 셀 수도 없다……
그리고, 웃음기나 농담 없이 차분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보는 웨이드 윌슨이, 진정 그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로건은 그가 자신의 웨이드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 내 삶이 이리 평탄하게 흘러갈 리 없지. 평범한 행복은 과분한 소망이다.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믿었을까. 분노가 치밀었다. 언젠가 제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 자란 걸 알면서도 그를 신뢰하기로 결정한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고 제 신뢰를 저버린 변덕스런 애새끼를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 그는 웨이드 윌슨을 거칠게 발로 걷어찼다. 악! 벽에 등을 세게 부딪히며 바닥으로 쓰러진 녀석은 제 발로 서기도 전에 로건에게 목을 붙잡혀 허공에 들렸다. 용병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손아귀 힘에 숨이 막히는지 발버둥치며 손톱을 세우고 로건의 손등을 마구 긁어댔지만 아다만티움으로 이루어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제 옆구리에 틀어박힌 카타나를 뽑아내 바닥으로 던졌다. 녀석을 벽에 밀어붙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킨 다음 클로를 빼들어 녀석의 몸속을 난폭하게 쑤셨다. 으극, 웨이드의 입에서도 울컥 피가 솟았다. 입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한 비명이 로건의 손 안에서 웅웅 울렸다. 그는 움찔움찔 떠는 남자에게 바싹 몸을 붙이고 낮게 그르렁댔다.
“내가 그간 네게 너무 관대했던 모양이군. 난 습격당하는 걸 즐기지 않아. 나랑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면 얼마든지 쑤셔줄 테니까 말만 하라고, 친구.”
“컥, 이것, 좀, 쿨럭, 난 그냥 널…크헉, 널 깨우려 한건데.”
목졸린 신음 사이로 변명이랍시고 떠벌리는 말에 로건이 코웃음쳤다. 변명이 성의없어. 죽음 직전의 순간에도 유려하게 굴러가던 혓바닥은 어디로 갔지? 울버린의 악력은 성인 남성의 목뼈를 얇은 나뭇가지처럼 뚝 부러뜨리고도 남는다. 그러니 목을 부러뜨리긴커녕 숨통을 조이는 데에 그쳤다는 건 로건이 아직 남자를 많이 봐주고 있단 의미다. 이 버르장머리없는 꼬맹이가 알아차리기나 할까.
“정중하게 깨우는 방법은 모르나봐?”
위협적으로 속삭이며 손에 서서히 힘을 더했다. 순간 웨이드가 그의 손목을 절박한 손길로 텁, 붙잡았다.
“정, 끕, 정중하게 했어. 그랬, 더니 니가, 날 찔렀잖아.”
“뭐?”
“니가 내 어깨에 구멍냈다고, 이 머저리야!”
그제야 로건은 웨이드의 팔꿈치에 고였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핏방울을 발견했다. 그의 왼쪽 어깨를 감싼 수트 위에 날카롭게 찢긴 세 가닥 발톱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모를 수 없는 상처자국―자신의 흔적이다. 그는 당황하며 웨이드를 억누르던 손을 놨다. 녀석은 바닥에 주저앉아 목을 감싸쥐고 콜록, 밭은 기침을 내뱉었다.
“아 좆같네. 나 이거 손해보상 청구할거야. 앞으로 한 달동안 메리 똥은 니가 치워. 존나 아파 씨발.”
사포에 긁힌 듯 까끌한 목소리였다. 로건은 마른세수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연신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던 그는 마침내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같은 몸뚱이가 기어이 사고쳤구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의지와 상관없이 휘둘렀지만 자신이 저지른 짓이다. 로건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게 될까 두려웠다. 침묵과 고요 속 비명소리는 결코 그를 떠나지 않았으니.
로건은 피를 쏟으며 끙끙 앓는 웨이드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결국 곁에 둔 사람을 다치게 만들었다. 이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저떄문에 상처받는 경험은 한번이면 족했다. 이 꼬라지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스스로 통제하기 힘든 순간에 타인이 제 곁으로 다가오게 두지 않으려했다. 그래서 매일 밤 자신을 방 안에 가뒀다. 밤은 그가 가장 취약해지는 시간이었으므로.
분명히 문을 잠갔을텐데.
“방엔 어떻게, 왜 들어왔어.”
신음을 삼키던 웨이드는 자신을 추궁하듯 따지는 로건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올려보며 답지 않게 말을 잃었고, 이내 날선 웃음소리를 냈다.
“…와, 지금 그걸 따지는 거야? 울버린 사전에 ‘미안해’는 없나 봐? 왜긴, 열일하고 귀가했는데 니 방에서 끔찍하게 앓는 소리가 들리잖아. 난 아픈 사람 외면하는 싸이코패스가 아니고, 마침 여긴 내 집이고, 와 세상에! 마스터키가 나에게 있네? 그래서 문 좀 땄어. 정말 진심으로 죄송하네요.”
“비꼬지마. 내가 문을 잠갔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란 생각은 안 들든?”
“뭐, 200년 묵은 오소리는 딸칠 때 뭘 떠올리는지 궁금하기야 했지.”
“웨이드!”
“소리지르지 마! 난 널 걱정했다고!”
씨근대는 숨소리가 잦아들고 정적이 찾아왔다. 웨이드는 화가 잔뜩 나서 바닥만 꼬나보고 로건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침묵이 거북했다. 보통의 경우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웨이드였다…그러나 지금만큼은 반대였다…로건은 제 평생의 친구로 여겼던 적막과 고요를 견디기 어려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걱정, 걱정이라. 문득 명치 부근이 꽉 죄어들었다. 먼 과거에 그에게도 있었다. 자신을 걱정하고 사랑해주는 친구들, 가족같은 엑스맨들. 순간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귀에 이명이 울렸다. 걱정, 그래. 너희들은 늘 나를 걱정한다고 말했다.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하지만 봐.
그랬던 너희들은 지금 어디에 묻혀있지?
서투른 호의의 댓가를 호되게 치른 웨이드는 입을 꾹 다문 태세를 고수했다. 어설프게 남을 위해 나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는 비틀비틀 일어서서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를 낚아채 머리 위로 푹 눌러썼다. 로건을 짧게 노려보고 방을 나서려는 그를 향해 늙은 남자가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걱정해달라고 한 적 없어.”
“야, 그냥 ‘미안해’나 ‘고마워’하면 안돼? 꼭 어렵게 가야겠어?”
“아하. 이젠 날 가르치려 드는군.”
인정한다. 로건은 지금 고집부리고 있다. 실수 전문가인 웨이드 윌슨조차 쉽게 정답을 말할 정도로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정답을 말하지 못한다. 자신이 이다지도 위태로운 존재란 걸 인정한다는 건 즉, 자신을 받아준 친구들…가족들이 예외없이 끔찍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냉정한 현실마저 인정해야 하니까.
한 마디로.
자신이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는 인간이란 걸 끝끝내 받아들여야 해서.
“쉽게 말해줄까? 나가.”
그래서 그는 최악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 많은 선택지 중에 로건은 회피를 골랐다. 그건 임시방편이지만 꽤나 잘 먹히는 수단이다. 이제까지는 그래왔다. 그는 모두에게서 등을 돌렸지만 모두가 그를 기다렸다. 돌아올 것을 알기에 그가 준비될 때까지 시간을 줬다. 그들의 용서와 자비는 그가 돌아갈 자리를 마련해줬다.
“뭐라했냐?”
“당장.”
“여긴 내 집이고, 넌 내게 그럴 말할 자격 없어!” 웨이드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로건은 굽히는 방법을 모르는 남자다.
“좋아, 내가 나가지.”
그러나 그가 간과한 한 가지―그가 상대하는 자는 데드풀이다. 인내심이라곤 털자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살인 용병. 과연 그에게 용서나 자비를 배울 기회가 주어지기나 했을까?
그러니까, 로건은 그가 총을 꺼내든 줄도 몰랐다가 뇌진탕이 온 것처럼 시야가 울렁거리고나서야 웨이드 윌슨이 그의 미간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총알은 그의 두개골을 꿰뚫지 못하고 이마 정중앙에 박히는 데에 그쳤지만 웨이드는 아랑곳않고 이번에는 그의 명치와 옆구리, 무릎 위를 향해 총을 쐈다. 정확하게 급소였다. 로건은 근거리에서 발사된 총알이 제 몸 깊숙이 박히는 걸 느꼈다.
뇌가 뒤집힐 듯한 분노가 이성을 압도했다. 그는 욕설과 함께 몸을 날려 웨이드를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얌전히 과녁이 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어느새 치켜세운 클로로 머리통을 쑤시기 위해 내지르나 용병은 날래게 몸을 굴려 공격을 피해간다. 보통 사람은 똑바로 잡고 서기도 어려운 묵직한 총을 어린애들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가볍게 다룬다. 총알이 허공을 가르고 칼날과 칼날이 맞붙은 싸움 끝에 방안은 난장판이 된다. 두 남자는 한치의 물러남 없이 서로를 난도질한다. 허공을 가르는 총알에 전등이 파삭, 깨지고 헛손질에 벽지가 갈라지고 드러난 콘크리트 벽에 피가 튄다. 부웅, 자신을 향해 휘둘러 날아온 의자를 피하기 위해 웨이드가 몸을 숙이자 와장창 소리내며 창문이 깨진다. 곧 바깥으로 날아간 의자가 무언가에 부딪혀 박살나는 소리와 더불어 자동차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린다. 숙였던 몸을 일으키는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로건이 웨이드의 가슴팍에 세 개의 칼날을 단단히 박아넣는다. 괴롭게 헐떡이는 소리를 배경삼아 로건은 용병의 몸을 마구잡이로 베었다. 살점이 튀고 피가 흩뿌려지는 살육 속에서 웨이드는 정신을 잃기는 커녕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손을 옆으로 뻗어 협탁 위 텅 빈 위스키의 병목을 잡았고, 눈앞의 두개골을 향해 망설임없이 병을 내리쳤다.
“이런 거로는 날 못 죽여” 로건이 가볍게 목을 돌리며 빈정댔다.
“그럴까?”
웨이드가 비열하게 웃더니 톱날처럼 깨진 병 아랫부분으로 로건의 목덜미를 찔렀다. 들쭉날쭉한 첨단이 피부를 찢고 목의 혈관을 터트렸다.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남자를 밀어낸 웨이드는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침대 위에 등으로 떨어졌지만, 매트리스 반동을 이용해 곧바로 몸을 날리면서 유연하게 다리를 휘둘렀다. 덩치에 비해 놀랍도록 가볍고 날랜 몸짓이었다. 만약 로건의 골조직이 평범한 사람과 같았다면 턱뼈가 부숴졌을 것이다.
그러나 로건은 자신의 턱을 가격한 발차기에 잠깐 표정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는게 다였으며, 곧바로 복사뼈 부근을 잡아채서 그를 방안의 모서리진 데로 던져버렸다. 으으윽,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흘렀다. 목에 박힌 유리병을 단숨에 뽑아낸 로건은 힐링팩터가 상처가 아물게 하도록 내버려두고 맥을 못 추어 빌빌대는 웨이드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를 번쩍 들어올려 침대로 집어던졌다. 노련한 용병은 곧바로 몸을 일으킨 뒤 종아리에 수납된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내 덮쳐오는 남자에게 몸이 짓눌리고 날카로운 꼬챙이에 손바닥을 꿰뚫려 매트리스 위에 고정되었다. 압도적인 힘 차이 앞에선 최고의 용병이란 찬사도 무력했다. “아악, 씨발! 개같은 포세이돈!”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위에 올라탄 남자가 그를 거의 납작해지도록 찍어눌렀다. 로건은 제 얼굴을 향해 발작적으로 주먹질하는 웨이드의 반대쪽 손을 강압적으로 떼어내고 시트 위에 내리누른 뒤 손바닥 안쪽에 클로를 깊게 꽂아넣었다. 웨이드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펄떡이자 터져나간 베개에서 뿜어진 깃털이 나풀댄다. 손등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을 짓이긴 후에야 클로를 거둔 로건이 고양감에 취해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띠었다. 힘줄과 신경을 모조리 끊어놨으니 녀석의 힐링팩터가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이후 몇 분간은 주먹쥐기조차 어려울 거다. 그는 자신이 제압한 사냥감을 여유롭게 내려봤다.
“예쁜이, 더 아프기 싫으면 착하게 굴어.”
“좆까, 헉, 넌, 씨발, 전 우주 통틀어 가장 끔찍한, 울버린이야.” 웨이드가 간헐적으로 헐떡이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 말에 로건은 폭소를 참지 못했다. 미친 사람처럼 숨이 넘어가라 웃다가 한순간 뚝, 웃음을 그쳤다.
“나도 알아.”
그리고 웨이드는 자신을 내려보는 어두운 눈동자와 담담한 목소리에 짙게 묻은 슬픔을 느꼈다. 그건 아주 찰나라서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봤을지도 모른다……
웨이드는 자신이 느낀 것에 의아함을 제기하기도 전에 제 얼굴 위로 크게 그림자 지는 로건의 주먹을 마지막 기억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진짜로 버리기 아까운 이유로 방생22...)
혼자 사는 삶의 가장 큰 단점은 아침에 치우지 못한 커피잔이 저녁에 귀가했을 때 그 자리 그대로 있다는 점이다. 어두운 거실 불을 밝혔을 때 자신을 기다리는 현실이 말라붙은 커피자국일 때 웨이드 윌슨은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반겨주는 사람 없고 기다려야 할 사람 없는 철저한 외톨이는 싫다. 바네사나 알,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살았던 경험은 그를 더욱 외로움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그는 혼자 남겨진 삶에 자신없다.
울버린은 하우스메이트로서 꽤 훌륭했다. 가끔 웨이드는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컨디션으로 집에 돌아왔고, 뱀이 허물 벗듯 수트에서 몸만 쏙 빼내서 침대에 퐁당 빠져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눈을 뜨면 옷가지가 세탁물 바구니에 들어있거나 옷걸이에 곱게 걸려있는 걸 발견하곤 했다. 데드풀 수트가 드디어 자유의지를 갖고 걸어다니기 시작한 게 아닌 이상 누구의 노력이 들었는지 모를 수 없다. 그래서 웨이드 역시 때로 로건이 만든 아수라장을 대신 처리하며, 말하자면, 꽤 괜찮은 룸메이트 역할을 수행했다. 그건 상당히 좋은 경험이었다. 웨이드는 그들이 서로를 돌봐준다고 생각했다.
착각도 유분수지.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에 로건의 방에서 혼자 덩그러니 눈을 뜬 웨이드가 눈앞에 펼쳐진 외면하고픈 풍경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도로 눈을 감았을 때 그는 마침내 로건이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개판이 된 방에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은 그를 아프게 만들었다.
차이점은 명확하다. 로건은 잠시 머무를 곳이 필요했고, 함께 살 사람이 필요한 쪽은 자신이었다. 방 한 칸을 내어주며 으스댔지만 그가 거절하고 뒤돌아 떠날까봐 내심 조바심 냈다. 멍청한 웨이드 윌슨. 로건이 진짜로 너랑 살고 싶어서 여기 남았겠어? 넌 그냥 마침 거기에 있어서, 편리해서, 쉽게 뭐든 다 내주는 사람이라서 선택받은 거야. 주제도 모르고 규칙을 어기다니. 그의 영역을 침범한 대가를 치룬 거다. 버림받는 건 익숙하다.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잖아. 그저 다시 시작될 뿐이다. 말라붙은 커피자국과 동거하는 삶.
씨발.
근데 이게 내 잘못인가?
웨이드 윌슨은 억울했다. 일반적으로 “넌 진짜 미친새끼야.” 라거나 “널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는 말은 듣는 쪽은 그였는데 어제는 드물게 역할이 반전되었다. 개자식이 지만 정신병 있는 줄 알아. 감히 날 정신병으로 이기려 들어? 그러나 억울함을 쏟아부을 대상은 영영 사라졌고 발 디딜 틈없이 어지럽혀진 방은 정리가 필요하다. 그는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갈거면 지가 벌여놓은 난장판이나 해결하고 가든가. 하여간에 끝까지 재수없는 새끼. 고고한 척은 혼자 다해요. 웨이드는 유리조각을 밟지 않으려 발끝을 세우고 살포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깨진 창문으로 들어온 찬바람 때문에 방안이 휑하다. 아 창문. 수리비 내고 가라고 할 걸. 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디든 심각하지 않겠냐만은 무엇보다도 피가 말라붙은 벽 청소가 시급하다. 벽지로 새로 발라야한다. 도배업자를 부르면 살인사건이 벌어진 줄 알고 까무라칠거다. 이런 얼굴을 한 남자가 연쇄살인마인 건 너무 개연성 있잖아. 웨이드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좋아, 도핀더를 불러야겠어. 히어로 지망생인 녀석에게 알려주는 거야. 네가 히어로가 되는 건 무리지만 내 사이드킥부터 시작하는 건 나쁘지 않은 시도야. 사이드킥의 기본 소양을 지금부터 알려주지. 그건 바로 도배 능력이야……그리고 히어로와의 동거가 일반적이거든. 나랑 같이 사는 거 어때? 뭐? 로건? 그 씨발놈은 뭐하러 찾아. 대단하신 울버린이잖아. 모두가 선망하고 따르는 히어로 중의 히어로. 누가 그를 거부하겠어. 나같은 거랑은 근본부터 다른 영웅이신데 뭘. 또 어느 집에 쳐박혀서 술이나 쳐마시겠지. 남의 술 창고나 털면서 말이야. 오, 썅. 나한테 청구서 날아오면 안되는데? 확실히 해둬야겠어. 데드풀과 울버린은 결별했으니 나한테서 그 새끼 찾지 마세요……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간 웨이드는 자신이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너 뭐해?”
그들의 동거 계약은 아직 유효한걸까? 놀랍게도 로건이 거실에 있었다. 등을 보이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물건은 한 군데에 둬. 배변패드는 또 언제 위치를 바꾼거야? 집을 다 뒤져도 찾을 수가 없잖아. 젠장.”
“그건 왜?” 웨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뒤통수에서 답을 찾고자 웨이드는 골똘히 머리를 굴리다가 별안간 깨달았다.
아 설마.
한 달동안 메리 똥 치우라고 한 것 때문에?
웨이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울버린이, 미안하다곤 죽어도 말 못하는 꼬장꼬장 늙다리 뮤턴트 엑스맨이 내가 농담처럼 흘린 말을 기억하고 개똥을 치운단 거?
깜찍아…
너 이름값 좀 하네? 이거 화해의 손내밀기라고 봐도 돼?
단지 그가 떠나지 않았단 걸 확인했을 뿐인데 마음 속 응어리가 반절은 녹아내렸던 웨이드는 남은 반절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등신이 따로 없지? 나도 알아. 멍청하고 물러터져서 이용해먹기 딱 좋은 호구새끼. 비웃을만 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는…그는 정말로 혼자가 싫었다….
“배변패드. 다 떨어져서 사야 돼.”
“아 씹. 그런 건 빨리 말해.”
“같이 사러 나갈래? 장도 봐야 돼.”
“그래. 참, 아침 만들어놨어. 니가 쳐자느라 벌써 점심이지만 아무튼. 먹든가 버리든가 니 맘대로 해.”
과연 식탁에 올려진 접시 위에 싸늘하게 식은 팬케이크의…시체? 가 있다. 웨이드는 접시와 포크를 들고 소파로 이동해서 풀썩 앉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난 이걸 굽는 냄새를 좋아하는데, 킁킁, 이거 팬케이크 맞아?”
“야, 먹지마. 내놔.”
울컥한 로건이 접시를 빼앗기 위해 손을 뻗자 웨이드는 잽싸게 접시를 몸 뒤로 숨겼다.
“울비가 날 위해 만든 걸 버린 순 없어! 다 먹을게. 약속.”
웨이드는 행복한 표정으로 작게 콧노래까지 불렀다. 큼지막하게 자른 팬케이크 한 조각을 입안에 한가득 욱여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한참 걸려서 목구멍 아래로 삼킨 다음 그는 빙긋 웃고 슬그머니 엉덩이를 뗐다.
……메이플시럽을 어디다 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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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덷]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사망 소재
※울버린과 데드풀(딱히 사귀진 않지만 쓴 사람이 울덷 고정이라서 원산지 표기같은 겁니다)
아마도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 중에 나온 말이었을 거다. 웨이드 윌슨과의 대화란 게 대체로 그런 식으로 시작되는지라 맥락이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만 바보가 된다. 격전 후 너덜너덜해진 하객용 소파에 몸을 풀썩 내던지고 검지손가락을 방아쇠울에 걸어 장난감 다루듯 휙휙 돌리던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그때 로건은 총과 칼과 폭발이 난무하는 싸움장이 된 결혼식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웰컴 드링크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가 도수는 거의 제로에 가깝고 지독히 달기만 한 음료수를 즉시 뱉어냈다. 이딴 것도 술로 치냐? 마구 구겨진 로건의 얼굴을 보며 웨이드는 즐겁게 웃었다. 그게 요즘 유행이래 오소리야. 아그극. 웨이드의 온몸이 기묘한 각도로 뒤틀렸다.힐링팩터는 피로 얼룩진 용병의 부서진 몸 이곳저곳을 난폭하게 수리했다. 뼈가 붙고 살이 차오르며 몸속에서 칵테일처럼 뒤섞인 장기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고통이 마침내 잦아들자 웨이드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하튼. 결혼식은 축의금을 두둑하게 챙기기라도 하지, 장례식에 돈을 많이 들여봤자 상조회사 배불려주는 꼴만 더 돼?”
“젠장, 고작 이게 다라고.” 케이터링 테이블을 샅샅이 뒤져 포도주를 겨우 찾아낸 로건이 중얼거렸다.
“난 아직 한 번도 결혼이나 장례를 겪어본 적 없지만, 사람들 말로 결혼식에 온 사람보다 장례식에 와준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대. 어떻게 생각해 로건? 진짜야?”
“이 핑거푸드는 나쁘지 않네.”
“만약 그렇다면 나도 내 장례식에 와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어줘야 하니까, 같이 고민 좀 해주라 울버린아. 나만 할 수 있는 스페셜한 이벤트라면 역시…3일 만에 부활하기는 어떨까?”
“지루한데.”
“동의해. 창의적이지 못했어, 월드 베스트셀러를 모방했거든, 잠깐만, 너 내 말 듣고 있었어?”
웨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스크 바깥으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표정 변화에 로건이 피식 웃었다. 그는 코르크 마개를 이로 물어 가볍게 뽑은 다음 소파 하나를 전부 차지한 용병의 다리를 툭툭 쳤다.
“치워봐. 같이 앉자.”
로건은 소파 한구석에 편히 몸을 기대고 떫은 와인으로 입안에 감도는 인공적인 단맛을 씻어내렸다. 와인을 싸구려 맥주처럼 들이켜는 남자에게선 교양이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지만, 오히려 야성미가 더해져서 인정, 더럽게 섹시하긴 하네, 웨이드가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왜 다들 울버린의 유전자를 가지지 못해 안달인지 납득할 정도야.
남자는 저를 희롱하는 말을 무심히 넘겼다. 그리고 턱밑으로 흐른 와인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내고 말했다.
“네가 가본 곳을 참고하면?”
웨이드가 투덜거렸다. “그게 문제야. 솔직히 말해 나는 이때까지 ‘내가 죽일 사람의’ 결혼식과 ‘내가 죽인 사람의’ 장례식 말곤 가본 적이 없어서 보통의 경우 뭘 하는지 모르겠다고. 너도 예상하겠지만 내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혼비백산, 장내는 아수라장, 대혼돈의 멀티버스거든! 격식 차리는 머저리들이 허둥대는 꼬락서니가 되게 재밌어. 내 특기 중에 하나야. 기념일 망치기.”
“친구들 결혼식엔 가봤을 거잖아.”
그 말에 웨이드는 신랄하게 웃었다. 하!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 중 하나 골라봐. 빨간 마스크를 쓴 미치광이가 결혼식에 나타나는 것과 뭉개진 페퍼로니 피자같은 웨이드 윌슨이 결혼식에 나타나는 것, 뭐가 덜 끔찍해?”
“난 둘 다 괜찮아.” 로건이 어깨를 으쓱였다.
푸우우, 웨이드는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너야 나한테 홀딱 반했으니까. 내 말은, 아무도 날 반기지 않을 거야. 누가 좋아하겠어. 살인하기 위해 결혼식장에 등장하는 암살자든 할로윈 악몽에나 나올 법한 괴물 얼굴을 한 자식이든.”
“너 그렇게까지 끔찍하지도 않다니깐.”
“슬슬 궁금하네. 네 콩깍지 도대체 언제쯤 떨어져? 우리가 함께한 지가 보자…얼마나 됐지, 몇 년이더라.” 웨이드 윌슨은 기억을 더듬는 표정으로 허공을 보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다가 빠르게 포기하고 말했다. “...그 세월 동안 매일 내 얼굴을 보면 미칠 만도 해.”
“친구, 난 거짓말 안 해. 미치지도 않았고.”
“워우. 제정신으로 이런 말 하는 게 더 무서워.”
로건은 가만히 웨이드를 쳐다봤다. 노려보는 것에 가까웠다. 녀석은 때로 그를 무척이나 열받게 했는데 거기엔 짙은 자기혐오 성향이 연관되어서 로건은 녀석을 더 질책하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지 못하는 괴물이 되었고―적어도―이 세상에서 녀석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유일하다. 게다가 막 ‘변화’가 생겼을 때 그와 마주친 사람들의 반응이 저 유쾌한 용병의 영혼에 깊은 두려움을 새긴 게 분명하다. 웨이드는 늘 명랑한 말투와 가벼운 단어 선택으로 말의 무게를 속였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의 무게까지 속이진 못했다….
결국 로건은 나지막이 한숨 내쉬는 데에 그쳤다. 넌 네 친구에게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해. 서투르게 위로하는 로건을 바라보며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던 웨이드가 오 아냐! 하며 그의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아냐. 걔네는 날 초대했는데 내가 안 갔어. 날 변호하자면, 너는 그런 적 없어? 내가 걔네 인생에서 빠져주는 게 더 낫다고 느낄 때 말이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로건은 말을 아꼈다.
왜 모르겠어. 난 지금도 느껴, 웨이드 윌슨. 아주 뼈저리게. 로건은 쓰게 웃으며 와인을 비웠다.
“…좋아! 결정했어. 나만이 할 수 있는 스페셜한 이벤트.” 웨이드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마스크 위로 히죽대는 미소가 떠올랐다.
“말해봐.”
“바로바로…” 실컷 뜸 들이다가 한다는 말이, “…조용한 장례식! 어때, 누가 예상하겠어, 그 데드풀의 장례식이 울음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게 치러질 거라고.”
“되겠냐?” 로건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웨이드 윌슨만큼 소란스러운 그의 친구들의 면면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시끄럽고 경박한 장례식이 될걸.”
“아니, 그럴 리 없어. 왜냐면, 아무도 부르지 않을 거니까! 악단도, 댄서도 없어. 아무도.”
NOBODY. 웨이드가 웃으며 덧붙였다. “내 장례식에는 절대, 절대로 사람들 초대하지 마. 아니 그냥 장례식을 하지 마. 나 알지? 사람들이 슬퍼하고 우는 순간에 아무 농담도 건넬 수 없는 거야말로 내게 닥친 가장 커다란 비극이란 거. 광대의 숙명이랄까. 너도. 날 위해 울지마. 네 눈물은 더 의미 있는 사람을 위해 흘려.”
답지 않게 진지하네. 로건은 그의 파트너가 드물게 진지한 순간에 나누는 대화 주제가 왜 이따윈지 따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게 의미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버렸어. 남은 건 너 하나뿐이었다고.
그러나 로건은 혀끝에 머물던 말을 삼켰다. 그건 녀석에게 부담을 줄 뿐이라.
“네 뜻은 잘 알겠어. 수다는 그만. 이제 집에 가야지.”
그는 푹신한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웨이드를 붙잡아 일으켰다. 웨이드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몸을 받아들어 위로 끌어당겼다.
“으으, 싫은데.”
“더 늦으면 우리 둘 다 못 돌아가.” 입술을 삐죽이는 그를 향해 로건이 재차 단호하게 일렀다.
“나도 알아. 그냥 좀. 이대로 가기 아쉬워서.”
읏쌰, 유연하게 몸을 튕겨 똑바로 선 웨이드가 먼저 걸어갔다. 다소 빠른 걸음이었다. 로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따라갔다. 야. 천천히 가. 그는 용병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먼저 가지 마 웨이드.
웨이드.
그러나 남자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병은 앞서갔다. 입안이 말랐다. 손을 뻗어봐도 막을 수가 없다. 몇백 년의 세월도 저것 앞에선 무력하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돌연 웨이드가 그를 돌아봤다. 퍽 발랄한 투로 입을 열었다.
“이봐 로건. 내가 그리워?”
죽은 사람을 이쪽에 붙잡아두는 건.
그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로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움이라, 굉장히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참회, 비탄이야말로 그에게 걸맞은 단어가 아닐까. 죄책감을 빌미로 책임회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는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이려 했다. 웨이드의 죽음에 걸린 자신의 책임.
그러나 웨이드는 그가 자학하며 술통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심지어 죽어서도 그 녀석은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빼내려 대뜸 찾아오곤 했다. 새로운 악몽이 그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정신을 쏙 빼놓는 수다를 이어갔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애쓴다, 염병.
하지만 그 노력 때문이라도 로건은 살아야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웨이드가 낄낄거렸다.“앙큼하긴. 깜찍아, 너 거짓말에 소질 없어.”
맞아. 우리 중에 빌어먹을 거짓말쟁이는 너잖아. 로건이 잔잔하게 웃으며 수긍했다.
그래서 묻는 건데 말이다.
“하나만 확실하게 해. 너 진짜로 죽은 건 맞아?”
말없이 짓궂은 미소를 씩 지은 웨이드가 그를 향해 손키스를 날렸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지, 자기야.
“꿈에서도 보고 싶어야 할 정도로 날 사랑하는지 몰랐어. 종종 놀러 올게.”
* * *
데드풀과 울버린.
두 사람은 죽지 못하는 저주로 엮여 있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웨이드 윌슨이 저주를 풀고 혼자 도망갔다. 제기랄.
남의 인생에 멋대로 끼어들고 끌어들여 놓고 떠날 때까지 제멋대로다.
마지막까지 같잖고, 철딱서니없고, 나사 빠진 등신새끼.
듣고 있냐 머저리야. 내 말에 반박하고 싶거나 한판 붙고 싶다면,
내 옆에 돌아와서 해. 난 시간이 아주 많거든. 넘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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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시마]藍(미완)
あい [藍] 명사
1. 식물 쪽.
2. 남빛.
이부키 아이는 생각과 행동의 거리가 없다시피 한 인간이었다. 체대 시절에는 아직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꼰대질하는 선배들에게 여지없이 말대꾸했다가 많이 얻어맞았고 육상 국가대표로 발탁된 후로도 코치와 감독에게 "발만 빠른 망나니"란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 모두의 눈엣가시 같은 이부키였지만 달리기 실력에 있어선 발군이었기 때문에 그는 안정적으로 국가대표로 뽑혔다. 국가대표 선수촌에선 온갖 일이 벌어졌다. 그곳은 하나의 거대한 사랑촌에 가까웠다. 번갈아 가며 사귀고 흘레붙고 헤어지는 선수들 사이에서 이부키는 홀로 연습에만 몰두했다. 그는 피지컬이 좋고 입버릇처럼 「꺄르르 우후후」하고 싶다고 말했기에 유혹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부키는 대놓고 팔뚝을 쓰다듬는 손길이나 술자리에서 실수인 척 허벅지에 안착하는 손길을 응? 조심해야지~ 하며 모두 물리쳤다. 그의 신조는 '러브가 없으면 하지 않아!' 였다. 아무리 미모가 빼어나고 몸이 좋은 여자선수라도 처음 본 사이에 러브가 발동하지 않았고 그를 아는 육상부 선수들은 그를 기피했다.
그랬던 이부키 아이가 치정극에 휘말려서 폭력을 쓰는 바람에 국가대표 선수단에서 퇴출을 당했다는 건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위해 나설 만큼 친분 있는 사람이 없던 이부키는 변명 한마디 하지 못하고 선수촌에서 짐을 싸고 나왔다.
어디로 갈까, 커다랗고 투박한 검은 캐리어를 끌고 터미널에 서서 고민하던 이부키는 터미널 내부를 둘러보다가 운명처럼 그 책자를 발견했다. 넓게 펼쳐진 해안도로, 푸른 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그는 책자를 덥석 집어 들고 터미널 매표소로 달려갔다. 여기! 여기로 가는 표 주세요!
주니어 때부터 국내외 대회에 참가하면서 받은 메달과 상금이 적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이부키는 그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전부 모았다. 그래서 그의 통장에는 바닷가 근처에 덩그러니 서 있는 오래된 상점을 사고도 남을 정도의 돈이 모여있었다. 그는 그곳에 짐을 풀었다. 처음부터 가게를 열려고 마음먹고 떠난 여행길을 아니었다. 하지만 해변에 늘어선 외관이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카페나 식당을 지나치다가 발견한 낡은 외관의 빈집을 어쩐지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그는 지금도 생각과 행동의 거리가 가까웠고, 사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임대문의] 아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회색에 가까운 파란 지붕과 한때는 하얀색이었을 지저분한 외벽. 그는 그곳을 자신의 보금자리로 삼기로 했다.
정리정돈의 아이쨩, 인테리어의 아이쨩. 형편이 좋지 않아 항상 맞벌이했던 부모님 아래서 자란 이부키에게 청소, 빨래, 요리 등등 집안일은 달리기만큼이나 쉬웠다. 종일 빈 상점을 쓸고 닦고 청소한 다음 간단한 음식을 해 먹으면서 그는 가게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했다. 지붕에 앉은 먼지를 씻고 햇빛에 말린 다음 진한 쪽빛을 입히면서도, 외벽에 하얀 칠을 하고 바다를 향해 난 창문의 유리를 갈아 끼우고 창틀을 다람쥐 색으로 칠하면서도 그는 내내 가게 이름을 생각했다. 내부는 따스한 원목 테이블과 의자로 채우고 벽에는 그가 좋아하는 선수, 락 페스티벌, 풍경 등등 일관성 없는 포스터를 액자에 넣어 장식했다. 작정하고 장사를 시작할 생각이었다면 조금 다른 인테리어를 떠올렸겠지만, 그는 이곳이 자신의, 이부키 아이의 집임을 표시하고 싶었다.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었던 한 남자가 마침내 걸음을 멈춘 곳. 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할 곳. 아, 그때 그는 이름을 정했다.
가게 이름은 「藍」. 그보다 더 적당한 이름이 없었다.
처음에는 간판도 걸지 않고 시작했다. 굴러다니는 A4용지에 커다랗게 이름을 써넣고 아래에 [영업중! 매일 11:00~21:00 ^0^] 귀엽게 그려놓은 이모티콘까지 그의 수제였다. 그래서 글자는 엉망진창 비뚤비뚤 날아갔지만, 그는 자랑스럽게 첫 간판을 붙이고 장사를 개시했다. 그의 주력상품은 일본 가정식이었다. 관광지에서 약간 동떨어진 해안가에 가정식이라니, 차라리 카페를 했다면 알음알음 블로그나 SNS 후기를 타고 찾아오는 사람이 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신 있게 가정식을 판매했다. 메뉴는 한가지였다. 「오늘의 아이쨩 식단」 바로 자신이 먹은 음식이었다. 어느 날은 고등어구이에 미소된장국이라면 어느 날은 텐동을 팔았고 야채가 많이 들어간 우동을 팔기도 했다. 어떻게 알아봤는지 드문드문 손님이 찾아왔다. 실력이 좋다는 칭찬도 받았다. 누군가 메모지에 '사장님이 미남이에요! 잘 먹었습니다!'라고 써서 벽에 붙이고 간 후로 한쪽 벽에 메모지가 점점 늘어났다.
그는 아침마다 해안도로를 달렸다. 쭉 뻗은 도로 옆으로 깔린 도보가 그의 러닝 코스였다. 편도로 5KM, 왕복 10KM를 뛰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기분은 날아갈 듯 상쾌했다. 높이가 낮은 안전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보는 모래사장과 이어졌다. 철썩-철썩- 귓가를 간지럽히는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서 힘껏 달리고 나서야 그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달리기는 그의 인생이었고, 선수 자격을 박탈한다 해서 그에게서 달리기를 빼앗아 갈 순 없었다.
그 사람을 발견한 날에도 그는 달리는 중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러닝화를 신고 가벼운 복장으로 집을 나선 시각은 평소보다 조금 이른 오전 7시 40분. 몸을 길게 쭉 늘여서 스트레칭하고 달리려던 이부키의 시야에 그 사람이 잡혔다. 모래사장 위에 위태로이 서서 수면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 이부키는 어쩐지 그 외로워 보이는 등에서 눈을 떼기 어려워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정신을 다잡고 지면을 박찼고 편도 5킬로를 달린 다음 터닝포인트를 돌았다. 평소보다 빠른 페이스였다. 그는 왠지 모르게 조급하게 달렸고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낮게 설치된 안전바를 뛰어넘어 모래사장을 향해 내달렸다.
아까 보았던 남자의 몸통이 절반 정도 바닷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시마 카즈미는 가수이자 배우다. 스무 살에 싱어송라이터로 데뷔를 했고 솔직하고 꾸밈없는 소년다운 보이스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인기 있는 가수들이 으레 그러하듯 드라마와 영화에 카메오 및 조연으로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값은 점점 올라갔다. 소속사는 사람들이 그의 천연스러움과 해맑음을 사랑하는 걸 알고서 그 점을 셀링포인트로 잡았다. 시마 카즈미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밝게 빛나는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이미지 메이킹했다.
시마는 시간이 흐를수록 스크린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과 실제의 자신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고 진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는 스크린 속 마냥 착하고 다정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타인에게 무심하고 약간은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드러낼 수 없었다. 보는 눈이 많은 촬영장에서 착한 사람을 연기해야 했던 그는 촬영을 마치고 차에 타자마자 입을 꾹 다물고 차창에 이마를 붙인 채로 숨을 고르는 시간이 늘어났다. 매니저는 그의 본래 성격을 알았기 때문에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차를 끌어야 했다. 어쩌다가 과속방지턱에 차가 덜컹거리기라도 하면 예외 없이 쏘아붙이는 시선이 백미러 너머로 매니저를 찔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혼자가 되면 후회했다. 매니저 형의 잘못이 아닌데. 굳이 따지자면 바보같이 소속사의 말에 끌려다니는 자신의 잘못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내보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까지만 해도 그 결정이 이토록 제 숨통을 조일 줄은 몰랐다.
바다는 싫어하지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가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훌쩍 잠적해서 회사를 발칵 뒤집은 전적이 있었건만 꼭 바다가 보고 싶어서 떠난 건 아니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서 어디론가 향한다면 종착지는 반드시 바다였다. 그랬던 그가, 언젠가 죽는다면 바다에 빠져 죽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어느 드라마 촬영장에서 그는 인질 역할이 맡았고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바다에 던져졌다. 보통 이런 촬영은 충분한 안전장치를 두고 촬영하지만, 정신 나간 감독은 리얼리티를 살려야 한다며 그를 진짜로 바다에 빠트렸다. 풍덩.
첨벙!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를 감쌌다. 떠밀리는 순간 있는 힘껏 숨을 참았기 때문에 그는 볼썽사납게 입과 코로 물을 들이켜지는 않았다. 그는 서서히 눈을 떴고 수면 위로 부서지는 물결무늬의 햇살 조각을 바라보며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반짝임을 발견했다. 수면에 가까운 해저까지 스며든 햇살이 자신을 감싸 안을 때 그는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꼈고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컷 사인과 동시에 그를 건져 올리는 스태프의 다급한 손길, 참았던 숨과 함께 터지는 기침, 별거 아니었지? 라는 무감각한 감독의 목소리...
그날 이후로 그는 종종 멍하니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드라마 촬영 중에도, 인터뷰 중에도, 녹음 중에도. 데뷔 6년 차나 되었으니 이미지 변신이 필요하던 시기였고 평소의 활기차고 발랄하던 모습과 달리 어딘지 헐렁해 보이는 모습은 오히려 팬들을 자극했다. 에...,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면서 웃는 시마와 시마상, 어딜 보는 거야? 집중하라고! 타박하며 까르르 웃는 패널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 아래로 댓글이 우르르 달렸다.
'나사 빠진 시마쨩, 하지만 귀여워-!', '이미지 체인지? 나쁘지 않을지도~'
또는 '저번에 물에 빠진 뒤로 뭔가 달라지지 않았어? 시마쨩 나른한 느낌도 좋지만..., 괜찮은거야?' 걱정하는 댓글과
'연차 쌓였다고 태도 바뀌네, 예전부터 좀 쎄하다 했어ㅋㅋ' 류의 악플.
시마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6년 동안 맞지 않는 옷을 입었으면 슬슬 날 자유롭게 풀어줄 때도 되지 않았나? 소속사에 불려가서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 나온 뒤 그는 지하주차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매니저에게 남길 문자를 적었다.
[조금만 쉴게요. 찾지 마세요.]
그대로 보내려던 시마는 머뭇거리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멋대로라서 죄송합니다.]
제일 빨리 출발하는 버스로 주세요. 이왕이면 바닷가로 부탁드립니다. 종종 깊은 사연을 가지고 터미널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매표원은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푹 눌러쓴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표 한 장을 끊어줬다. 시마에게 다행이었다면 그 매표원은 인터넷이나 TV, 연예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시마를 태운 버스가 떠나고 한참 뒤에 헐레벌떡 터미널로 뛰어온 매니저는 '시마 카즈미를 보았냐'고 물었을 때 매표원이 고개를 저었다는 점이다. 매표원이 표 사는 사람의 이름까지 외울 이유는 없었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쓴 사람을 보았냐고 물어봤다면 답변이 조금 달랐을 수도 있다.
버스는 밤늦게 도착했다. 시마는 터미널 근처 여관에 하루 묵었다.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하며 뒤척이다가 선잠을 잤고 눈을 떴을 때는 새벽 6시가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금 나가면 일출을 볼 수 있겠네,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시마는 일어났다. 붕 뜬 곱슬머리를 대충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그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해가 뜨지 않은 해안가는 깊은 어둠에 잠겨있었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해안도로를 걸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터벅터벅 걷다가 모래사장이 나와서 방향을 틀었다. 어느새 신발 안으로 들어온 잔모래가 튀어 올랐다. 하늘이 차츰 밝아지는 걸 느끼고 그는 수면을 마주 보고 섰다. 지평선 끄트머리에서 오렌지색 태양의 이마가 쑥 튀어나왔다. 반지처럼 지평선이 물들었다. 한껏 웅크렸던 태양이 기지개를 쭉 켜고 몸을 일으켰다. 반원이 되었다가 완전한 원형이 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길지 않았다. 시마는 태양이 떠오르고도 한참을 더 그 광경을 지켜봤다.
밀려드는 감정의 정체는 외로움이었다. 하, 시마는 바람 빠지듯 웃었다. 이런 감상이나 떨려고 도망친 건 아니었는데 당장 지금 그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건 가슴 아픈 팩트였다. 6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고 그저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게 좋았던 스무 살의 어린 청년이 도쿄돔을 가득 채우는 인기 가수가 되도록 해준 시간이었다. 서투르던 연기가 제법 물이 올랐다는 평가를 받던 차였다. 6년 동안 강요받은 성격으로 살다 보니 시마는 자신이 진짜로 밝고 상냥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끝내 탄성을 잃고 늘어진 것처럼 그는 고장 났다. 이때까지 어떤 모습을 어떻게 연기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실수가 잦아졌고 헐렁한 시마 카즈미가 되었다. 그는 너무 지쳤다. 돌아가기 싫었다. 다시 거짓말을 할 자신감이 사라졌다. 죽을 생각은 없었다. 죽는다면 바다에 빠져 죽고 싶다는 거였지, 죽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조금만 쉬다가 돌아가겠다고 말할 땐 진심이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했다. 한 반 정도만.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 건 다소 충동적이었다. 진짜로 바다에 몸을 던질 생각이 아니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종아리를 적시고 허벅지까지 차올랐다가 허리를 잡아 삼킬 정도로만. 딱 그 정도만 들어갔다가 나올 심산이었다. 막상 허리께를 적시는 바닷물을 느끼고 나니 조금만 더, 라고 생각하며 바닷물이 목까지 차오르도록 내버려 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당신 미쳤어? 죽을 셈이야?!"
그를 물에서 끄집어내는 거친 손길, 땀에 흠뻑 젖은 얼굴과 한껏 화난 목소리로 윽박지르는 낯선 남자의 말에 그는 놀라는 와중에도 억울함을 느꼈다. 우습게도.
*미완, 완결 예정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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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부시마] A fond adieu
* 2022.04.30. 18회 디페스타에 가온뉘 님과 함께 냈던 트윈지 <Restart> 개인 파트
*파일이 사라질 위험이라 백업용이기도 합니다.
*이부키와 시마가 가마상 면회를 갑니다.
*결혼도 합니다.
1.
10년이 있으면 뭘 할 수 있을까? 퀴퀴하고 썩은 내가 진동하는 트렁크룸에서 주고받은 대화를 떠올린다. 세상 모든 형사 드라마를 볼 수 있어. 영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겠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은 언제나 긍정적인 미래를 꿈꾼다. 내게 딱 일주일만, 한 달만 더 있었다면, 하는 가정법은 모두 지금보다 나은 결과를 꿈꾸기 때문이다.
10년도 그러한데, 20년은? 20년은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성인이 될 만큼 긴 시간이다. 20년이 있다면 뭘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막막하고 긴 세월에 말문이 막힐지 모른다. 어…글쎄요? 혀가 잘 돌아가는 달변가마저도 막연한 숫자에는 혀가 굳을 것이다. 이부키 아이의 인생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최적의 예시였다.
20년 전에 한 불량 청소년이 있었다. 그는 가난했고 만만했으며 건드려도 별 탈이 없을 쉬운 존재였다. 그래서 시비가 끊임없이 걸렸다. 반에서 물건이 사라지면 무심결에 돌아보게 되는 아이가 반에 한 명씩 있었는데, 예외 없이 이부키였다. 그의 부모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울 정도의 책임감뿐인 사람들이라 그가 사고에 휘말려도 학교에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부모가 아이를 방치하자 경찰이 학교에 들락거렸다. 학교장이 퇴학 운운해도 말리는 선생이나 편을 들어주는 친구 한 명 없었다.
그랬던 그가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찰학교에 입학해서 누구보다 빠른 발로 최악의 사태를 막는 멋진 형사로 자랐다. 중간과정을 건너뛰고 시작과 결말만 말한다면 사람들은 궁금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가마고오리 시게오라는 형사가 등장한다. 그는 열정이 가득하달지, 선의가 넘친다고 해야 할지. 이상한 형사였다. 모두가 포기한 문제아 이부키를 붙잡아다가 대뜸 이상한 걸 물어봤다더라. 캐치볼 할 줄 알아?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이라면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공원에서 뛰놀며 제 키를 넘겨 날아오는 공을 붙잡지 못해 달렸던 경험이 있겠지만 이부키에겐 아버지와의 다정한 추억 따위 없었다. 뭐, 던지고 받는 정도라면…. 이부키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형사는 이부키의 가슴팍에 한쪽 글러브를 던졌다.
‘룰이 있어. 캐치볼 한 번에 질문 하나를 할거고 너는 대답해야 해.’
‘멋대로네. 내가 왜 당신 말대로 해야 하는데?’
‘고집부리지 마. 네 얘기, 제대로 들어줄 테니까.’
좋은 사람. 이부키는 가마고오리를 그렇게 기억했다. 부모도 포기한 문제아를 올바른 길로 되돌려준 사람.
이부키 아이의 길지 않은 생은 불신, 혐오, 적의 등의 부정적인 단어가 빼곡히 적힌 노트였다. 미움을 받는 감각은 심장을 조각칼로 퍽퍽 파내는 것 같아서 익숙해지기는커녕 무뎌지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부키는 울지 않았다. 상처받은 짐승이 그렇듯 오히려 발톱을 드러내고 센 척했다. 그의 거친 면모가 상처 입기 쉬운 내면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걸 형사는 몇 마디 대화만으로 깨달았다.
이부키, 너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구나?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나는 너를 믿어.
부모도 날 믿지 않는데, 당신이 뭔데.
신뢰를 처음 받아보는 어린 들개는 그게 좋은 건지도 모르고 으르릉대며 경계했다. 가마고오리는 그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왔고 캐치볼을 이어갔다. 강풍은 외투를 여미게 하지만 따사로운 햇살은 외부를 벗게 한다지. 너를 믿는다는 말과 포기를 모르는 형사의 노력에 결국 이부키는 붉게 노을 지는 저녁, 강변의 공원에서 제게 날아오는 작은 공을 잡은 글러브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북받치는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나, 아직 돌아갈 수 있구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날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이부키 아이는 가마고오리 시게오를 따라 형사가 되었다. 그러니 그가 형사로서 사는 자세의 대부분을 만들어준 게 그 사람인 것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타인을 신뢰하는 다정함과 포기하지 않는 열정, 이부키를 구성하는 단어들이 가마고오리란 형사에게서 나왔다. 그는 이부키 인생의 나침반이었다. 그렇다면 이부키가 앞으로 어떤 형사가 될지는 ‘가마고오리’의 인생을 보면 되겠네?
지금 그 사람, 어떻게 됐어?
2.
이부키 아이의 인생에서 신은 언제나 제 편이 아니었다.
“이부키, 괜찮아?”
“응? 아, 오늘 꿈자리가 좀.”
드물게 늦잠을 잔 이부키의 눈이 빨갛게 부어 있는 걸 알아차린 눈치 빠른 파트너의 물음에 이부키는 어물대며 말을 아꼈다. 나 씻고 나올게. 잠에 취한 건지 눈물에 잠긴 건지. 먹먹한 목소리로 제 할 말만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이부키의 등을 빤히 보던 시마가 나지막이 한숨을 푹 쉬었다. 장마가 땅을 흠뻑 적시는 8월이 오면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지는 시마와 비슷하게 이부키는 벚꽃이 한창 만개한 4월이 찾아오면 자주 하늘을 올려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특히나 오늘은 더했다. 4월 5일. 제4 기동수사대가 첫 운전대를 잡은 날이자 가마고오리 레이코의 기일이다.
결말이 뻔히 보이는 꿈을 꾼다. 이부키는 본 적도 없는 사고현장을 되새김질한다.
그 날은 볕이 좋은 봄날이었다. 여보, 우리 벚꽃 구경가지 않을래? 만개한 벚나무는 보슬보슬 내리는 여린 봄비에도 꽃잎을 떨구기에 꽃이 지기 전에 보러 가자고 성화였다. 다리가 좋지 않아서 지팡이나 보행보조기의 도움을 받아야만 느린 걸음을 옮길 수 있는 아내를 혼자 보낼 수 없는 남자는 아내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선다. 자신이 다섯 걸음을 내딛는 동안 두 발짝을 떼는 완만한 속도에 보조를 맞추었다. 나 때문에 답답해서 어떡해? 여자가 배시시 웃으며 묻는다. 길지 않은 산책에도 피로를 호소하는 다리를 쉬게 하려 벤치에 앉으며 남자는 대답한다. 뭘, 당신이랑 보내는 시간이 두 배 늘어나서 좋아. 어머,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내가 결혼한 남자가 로맨티스트였다니? 물방울처럼 명랑한 목소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부드럽게 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연분홍색 꽃잎이 흩날렸다. 젊은 연인들처럼 그들은 손을 뻗고 날리는 꽃잎을 잡기 위해 허공을 움켜쥔다. 두 개의 웃음소리가 푸른 하늘 아래서 퍼졌다.
그것을 스크린에 영사된 한 편의 극을 관람하는 객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다음 장면에서는 그들 뒤를 따라 걷는 엑스트라가 된다. 꿈의 시점은 수시로 바뀌어서 이부키는 꿈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밖에서 관전하는 감시자가 되기도 한다. 그는 행복이 꿀처럼 넘쳐흐르는 부부의 웃는 얼굴을 두 눈에 담는다. 그들을 따라 웃는 입술이 세차게 떨린다. 따뜻한 물컵에 톡 떨어진 한 방울의 암청색 잉크처럼 불안함이 번진다. 높게 올라가는 롤러코스터는 올라가는 속도보다 빠르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정상에서 환히 웃는 부부에게 하얀 그림자가 들이닥친다.
끼이익-쾅!
사과? 오렌지? 어느 쪽이 좋아? 당신이 먹고 싶은 거로 해. 으음, 그럼 둘 다 담자. 장바구니가 딱딱한 바닥에 내던져진다. 바닥을 구르는 과일이 지나간 아스팔트 위에 브레이크를 밟은 흔적이 없다. 고무의 탄내, 으깨진 시트러스향, 악의가 덮치고 간 자리에 비명처럼 번지는 절박한 외침. 산산이 부서질 얇은 유리처럼 금이 간 창백한 얼굴….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남자는 바닥을 기어간다. 들것에 실리기 전까지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리라…영원히 함께하리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어진 선이 이부키를 가로막는다. 아무리 달려도 닿지 않는 거리감이 그를 일깨운다. 이건 꿈이다. 환상이고 원치 않게 뇌에 입력된 정보값이 재구성한 왜곡된 기억이다. 그럼에도 난, 할 수 있다면 막고 싶었어. 할 수 있었다면…….
평소보다 오래 씻고 나온 이부키의 눈이 퉁퉁 부었다. 흐르는 물에 뽀득뽀득 문질러도 채 씻겨나가지 않은 잿빛의 흔적이었다. 또 한바탕 비가 내렸겠지. 시마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자신 이상으로 이부키의 심정을 이해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만하다고 손가락질해도 좋다. 원래 시마 카즈미는 공손함과 거리가 먼 인간이다.
오늘 그들은 함께 레이코 씨의 유골이 안치된 봉안당에 가서 인사하고, 가마 씨의 면회를 가기로 약속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묻는다면 그들의 왼쪽 약지에 끼워진 동일한 디자인의 반지가 간단히 설명해준다.
인사하러 가자고 먼저 제안한 건 시마였다. 사귄 지 햇수로 약 2년이었고 이부키를 본가에 데려가서 소개한 지도 한참이다. 이부키가 관사 생활을 청산하고 시마의 멘션으로 들어온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결혼까지 할 생각이 없었던 시마의 생각을 180도 바꾼 건 그 동거생활이었다. 젠장, 같이 살면 안 좋은 점만 보인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점점 욕심이 났다. 이부키는 제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정식으로 청혼하고 결혼 준비를 했다.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카탈로그를 넘기다가 시마는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무심히 툭 말을 꺼냈다. 실은 오래전부터 얘기하려고 준비했으나 이부키가 줄곧 언급을 피해서 도통 말할 기회가 없던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넌 나 언제 인사 시켜 줄 거냐?”
“인사? 아…. 시마 알잖아. 나 부모님이랑은,”
“말고. 가마 씨네 부부한테.”
카탈로그를 넘겨보던 손이 멈춘다. 이부키의 동공이 잘게 진동한다. 시마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 확실히 하자.
“네게 부모님이라면 그쪽이잖아. 나, 아직 인사하러 갈 자격이 없는 걸까….”
부러 서운하다는 티를 내며 말꼬리를 흐리자 이부키가 세차게 도리질 친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게, 저, 나 예상을 못해서, 시마가 같이 가줄거라고….”
어순이 엉망인 말을 내뱉는 연인의 이마를 제 이마로 콩, 아프지 않게 찧었다. 이부키의 커다란 눈이 금세 일렁거린다. 같이 살면서 깨달은 것 한가지, 이부키는 눈물이 많았다. 상상 이상의 울보였다.
“바보야. 되려 늦었지. 서운해하실 거라고.”
“…응, 같이 가자. 고마워.”
이부키의 두 팔이 시마의 허리를 감쌌다. 어깨 위로 얹어지는 무게와 번지는 축축함을 느끼며 시마는 생각했다. 역시 내가 옆에서 눈물을 닦아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시마는 이부키가 울면 어쩔 줄 몰랐다. 연인의 우는 얼굴을 반기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고.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쁜 놈이니 당장 헤어져야 하고, 우는 게 지겹다고 짜증낸다면 개자식이니 한 대 패버려도 정당방위다. 약 20년 경력의 형사가 편을 들어주겠다.
시마는 눈물이 많지 않다. 감정이 벅차올라도 이를 악물고 꾹꾹 눌러 삼켜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억누르고 참는 것이 시마 카즈미의 좋지 않은 습관이었다. 그래서 수시로 눈가가 진하게 물들었다.
원래가 고급 식재료도 먹어본 사람이 다룰 줄 알고 연애도 많이 해본 사람이 능숙하다. 위로를 받아본 적 없으니 우는 사람을 달랠 줄 모르는 건 따지자면 시마 잘못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울 때 따뜻한 말을 건네어 눈물을 멈추게 하지 못하는 서투른 솜씨가 꽤 원망스럽고 분했다.
“울보.”
“놀리지 마, 시마쨩.”
“레이코 씨가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어. 날 귀한 아들 울리는 나쁜 놈인 줄 아실 거야.”
시마의 툴툴대는 목소리에 이부키가 살짝 웃었다. 본능이 발달한 형사는 투덜거림 속에 묻은 시마 식의 다정함을 재빠르게 읽어냈다.
“뭐야, 오늘따라 다정하네? 오늘 컨셉은 다정한 남편이야?”
“나 첫인상 꽤 신경 쓰거든? 형편없는 첫인상 만들기 싫으니까, 자.”
팔을 벌리고 가슴 부근을 툭툭 치자 이부키가 파핫, 웃음을 터트린다. 그는 기꺼이 연인에게 다가와 등을 끌어안는다. 비누 냄새를 은은하게 풍기는 젖은 머리카락이 시마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이부키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시마의 살갗에선 늘 포근한 냄새가 났다. 때로는 어설픈 말보다 온기와 숨소리를 주고받는 무언의 행동이 커다란 위로가 될 때가 있다. 피부 너머로 전해지는 심장박동의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의학적 지식은 잘 모르지만 말야, 이렇게 안고 있으면 심장이 같은 속도로 뛰게 된대. 그거 좋다, 나 방금 심장이 찌릿했는데 시마도 느꼈어? 참나, 바보는 안 옮아요. 두 개의 입술에서 동시에 푸스스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3.
한 사람의 생을 요약한 한 줄짜리 숫자의 나열에 그가 살아온 인생을 담기엔 역부족이었다. 빨간 십자가 아래, 가마고오리 레이코의 이름과 함께 새겨놓은 감정 없는 문구를 보며 이부키는 차라리 무덤과 비석을 세웠다면 그녀의 아름답고 충만했던 삶을 보다 훌륭히 표현할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유골함은 다른 사람들 것보다 유독 작아 보였다. 레이코 씨는 키가 작았어. 그래서 더 작은 상자에 담긴 걸까? 이부키는 습관적으로 파트너에게 물었다. 지식이 풍부한 시마 카즈미에게도 가까운 이의 죽음은 익숙하지 않은 주제라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다. 몰라, 원하면 더 넓은 곳으로 옮겨 드릴까? 그 말에 이부키는 짧게 고민하더니 이내 웃고 만다. 아냐, 레이코 씨는 기독교인이거든. 기독교에선 죽으면 영혼이 천국으로 간대.
해바라기에 둘러싸여 샛노란 미소를 짓는 레이코의 사진 옆에 인자한 미소를 띤 하얀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그녀의 손때 묻은 성경책이 함께 꽂혀있다. 크리스천은 죽으면 영혼이 천국의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간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아픔도 슬픔도 없이 행복하다고.
가마고오리 레이코의 사인은 내장 파열로 인한 즉사였다. 한발 늦게 보고서를 읽은 이부키는 사인을 확인하고 목 놓아 우느라 숨을 쉴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시마가 제 머리를 안고 토닥여주고 있었다. 괜찮아, 오래 아프진 않으셨을 거야.
살인자도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게 기독교의 교리였다. 그러니 가마고오리 시게오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사랑하는 아내와 같은 곳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인생의 전부였던 이를 살해한 자를 죽인 남자에게 후회가 있을까?
이부키는 두 발의 총성과 울렁이는 뱃속, 후각을 마비시키는 비린내 따위를 떠올린다. 핏자국이 선명한 검은 총신을 잡아채는 순간 난파된 배의 조각난 판자를 움켜쥐는 듯 절박하게 제 팔목을 잡아채는, 시체처럼 차가운 손길.
죽이지 마.
고작 네 음절의 유언을 남기기 위해 견뎠던 파트너의 숨결이 모래알처럼 부스러지는 순간, 애도보다 먼저 들이닥친 감정은 분노와 절망이었다. 이부키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이부키는 가마고오리 시게오가 내린 선택의 이유를 알아차린다. 그가 후회하지 않는 이유까지.
레이코가 읊조리는 기도문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뜻도 모르고 함께 외웠던 기도문을 어설프게나마 이해하는 시늉을 낸다. 그가 죽인 자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였다. 그가 진 죄를 용서한다면 나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 그리하면 나는 당신과 같은 곳에 갈 수 있겠지.
그런다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는 얼굴은 영원히 일시정지된 채 머물러있다. 인간의 한계로는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다. 당신을 그리 만든 자를 어째서 용서해야 하냐고. 그래서 방아쇠를 당기고야 마는 것이다.
이부키의 인생에서 신은 언제나 제 편이 아니었다. 신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부키는 자신이 늘 우선순위에서 한 발 밀려있다고 생각했다. 언제쯤 나를 굽어살피실까.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내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서 안 보이는 걸까, 그도 아니면 내 차례를 깜박 잊고 건너뛰었을까?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는 신이 그에겐 늘 가혹했다. 애도해도 모자랄 순간에 어째서 경찰학교 수업시간에 배웠던 사후경직 따위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며 이부키는 천천히 온기를 잃어가는 파트너의 손을 잡았다. 뛰지 않는 심장에 양손을 모아 올리고 불이 꺼진 눈을 덮어주는 웅크린 등이 들썩이다가 아래로 늘어졌다. 잿빛으로 흐려진 눈동자가 서서히 닫힌다. 슬픔의 무거운 추를 달고 가라앉은 난파선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신은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누군가 흔드는 듯 출렁이는 물살이나 웅크리고 누운 몸 위에 길게 드리운 어스름한 그림자, 또는 테이블에서 떨어진 쇳덩이의 둔탁한 소음이었다. 일어나라고 외치는 목소리의 증거가 어디에든 있었다.
사람은 늘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시간을 거슬러 가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막상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붙잡는 건 늘 준비된 사람이다.
살아있다면 언제든 이길 찬스가 있어!
이부키가 눈을 번쩍 떴다. 손발은 자유를 빼앗겼지만, 누구도 묶어둘 수 없는 그의 심장은 힘차게 고동쳤다. 한 단 아래에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채 잠든 파트너의 가슴이 옅게 오르내렸다. 시마, 부르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푸른색을 되찾은 시선 아래 산호처럼 빛나는 만 가지 감정이 반짝였다. 신은 드디어 이부키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기다려 마지않던 두 번째 기회를 줬다.
용서할 수 없으니 살인했다는 노인의 고백을 들은 후로 이부키의 나침반은 자성을 잃고 줄곧 헛돌았다. 배 위에서 방아쇠를 당긴 순간 이부키는 가마고오리를 이해했다. 그러나 심장이 돌에 짓눌리는 갑갑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살아서 파트너와 함께 뭍을 밟고 얼굴을 아프게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용서를 구하지 않는 쿠즈미를 잡고 나서 그는 깨달았다. 죽음은 가장 편한 도피처다. 용서하지 않는 남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안식은 사치였다. 그렇기에 죽일 수 없다는 지각이 찾아온 순간, 빙글빙글 돌던 바늘이 제자리를 찾았다.
올바른 곳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들고도 가끔은 길을 헤맬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그러니까. 하지만 언제든 다시 영점을 맞출 수 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이부키는 이제 한 사람의 등만 쫓던 어린 시절에서 졸업했다.
4.
레이코의 사진 앞에서 손을 모아 묵념한 이부키가 이내 눈을 뜬다. 시마는 한 템포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팔꿈치로 이부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응? 아…맞아, 정식으로 인사가 먼저지? 다소 길어진 상념을 휙휙 지워냈다.
레이코 씨, 이쪽은 시마 카즈미, 제가 늘 소개해주고 싶다고 한 그 사람이에요. 실제로 만났다면 레이코 씨도 시마를 좋아했을 거예요…이부키는 그간 못다 한 수다를 떨었다. 시마는요, 하며 제 연인을 자랑하다가 예전에 그랬잖아요, 하고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사진 속 레이코는 당장이라도 맑게 웃음을 터트리며 손뼉 칠 것처럼 생동감이 있어서 시마는 괜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우리 부모님 앞에서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앉았던 이부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시마의 성을 가진 다섯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는 가족인 자신이 보기에도 하늘을 찌르게 기가 센 사람들의 모임이라 이부키가 주눅 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드는 그를 보고 역시 친화력은 못 따라가겠다고 감탄했던 순간도 잠깐, 대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쪼그리고 앉아서 으아아,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 말하는 뒷목이 땀으로 축축한 걸 보고 놀랐었다. 이쪽은 실물을 대면하지 않는데도 이렇게 떨리는 걸 넌 대체 어떻게 견뎠나. 새삼스럽게도 이부키가 대단했다. 어서 인사하라는 이부키의 독촉에 양손을 가지런히 허벅지 위에 올리고 시마 카즈미입니다, 기름칠 덜된 로봇처럼 딱딱하게 머리를 숙이자 뒤로 넘어갈 듯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린다. 뭐야 시마쨩, 안 어울리게 긴장한 거야? 이런 거 완전 여유롭게 클리어―아니었어? 파트너의 흔치 않게 삐걱대는 모습에 이부키가 한참을 더 웃고는 시마의 한쪽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쭉 끌어당긴다. 편하게 해도 돼. 레이코 씨, 누굴 어렵게 하는 분 아니니까.
편하게 하라고 해도 말이야, 시마는 내심 투덜댔으나 시마 가(家)에 인사하러 온 날 이후로 제 형제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무심한 둘째의 근황을 본가에 업데이트하고 본가에서 일어난 일을 시마에게 전달해주는 황새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이부키라서 할 말 없게 만든다. 너도 처음엔 긴장하지 않았느냐는 반박에 기억나지 않는데요? 하고 반질반질 웃으며 시치미를 뗀다. 혀를 살짝 빼물며 시마를 놀리는 유치찬란한 행위에 피식 웃어버렸다. 참나, 네 나이 중 30년은 여기까지 달려오던 고속도로 위에 던지고 온 건지. 평소라면 초등학생이냐며 핀잔 한 스푼 얹었을 시마지만 첫인상, 중요하니까 말이야. 잔소리 대신에 그는 이부키가 듣지 못할 한마디를 레이코의 앞에 남겼다. 이부키가 좋은 녀석인 거 알고 있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웃도록 노력할 테니까, 지켜봐 주세요.
어깨에 멘 가방을 뒤적여 빳빳한 봉투 안에 담아온 하얀 청첩장을 꺼냈다. 이부키. 이거. 아 맞다! 받아든 청첩장은 유골함 앞에 비스듬히 세워진다. 곧 하나의 성을 나눠 갖기로 약속한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누구의 성을 따를지는 아직 협의 중이다. 세상에 시마가 더 늘어나는 건 싫다는 남자와 반드시 시마가 되어주겠다는 남자의 마운트 싸움에 결말이 나는 것도 나중의 이야기.
청첩장을 두고, 유골함 주변을 장식한 오래된 꽃을 버리고 새로 산 노란 조화를 올렸다. 레이코의 사진이 잘 보이도록 액자를 앞쪽으로 조금 꺼낸 다음 먼지를 깨끗하게 닦아낸다. 좋아, 다 됐나. 시마, 나 한 마디만 더해도 될까? 얼마든지. 이부키가 목을 가다듬는다.
기억나세요? 제가 결혼하면 꼭 와주기로 했던 거. 그 약속,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고 미안해하지 마세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잖아요. 삶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니까요. 레이코 씨도, 그리고…가마 씨도요.
끝으로 가선 목소리가 작게 잦아든다. 시마가 흘긋 눈을 돌려 이부키의 안색을 살핀다. 겨우 마른 눈가가 다시금 푹 젖지 않을까 마음졸인다. 저를 염려하는 연인의 기척을 기민하게 눈치챈 이부키는 이내 씩 웃었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눈을 찡긋인다. 슬프긴 해도, 내가 막을 수 없었던 순간들을 세느라 지금 내게 주어진 행복을 낭비하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 너와 함께할 수없이 많은 행복도 말이야. 나,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어.
저희 오늘 가마 씨를 만나러 가요. 음, 만나주지 않겠지만? 계속 부딪히면 언젠가 열리겠죠. 그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꼭 할 말이 있거든요. 그게 뭔지 레이코 씨에게 말해줄게요. 만약 저희가 가마 씨를 만나지 못한다면 당신이 꼭, 전해주세요.
5.
인간은 어찌도 이리 모순적인 존재인지,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짐이 무거우니 앞으론 끌차나, 요즘에는 바퀴 달린 장바구니도 나오더라고요. 그런 걸 가져 다니세요.’ 웃으며 말하는 사람도 제 가족에겐 ‘제발 이러지 좀 마. 무릎 안 좋다면서 왜 자꾸 혼자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민폐야.’ 짜증을 내버린다.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화를 내고야 만다. 이상하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정하라고 배웠으나 실제론 반대로 행동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속상함에 화를 낸다. 사랑하니까 힘들어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는 거다.
짐승은 죽음이 다가오면 가족 곁을 떠나 숨을 거둔다고 한다. 현관이 열렸을 때 훌쩍 집 밖으로 나가서 영영 행방을 알 수 없게 되거나, 잠깐 눈을 돌린 틈을 타서 조용히 심장박동을 멈춘다. 죽는 순간을 가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그들이 아주 잠시만 슬펐다가 일상으로 돌아가기 바라서. 결국, 모든 이유는 사랑으로 귀결한다.
가마고오리의 하루는 일 년 같았다. 그는 날이 갈수록 노쇠해졌다. 약은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춰줄 뿐 완전히 막지 못했다. 매일 한 페이지씩 사라지는 기억에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이제 그는 과거에 알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절반도 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는 상실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언젠가는 약을 먹는 이유도 잊게 되겠지. 그는 그 전에 제 숨이 다하길 바랐다.
이런 모습을 보이느니 마지막까지 외면하는 게 그 애를 위한 거야. 라고, 그는 희뿌연 가림막 너머에 앉은 시마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면회접수 마감 시간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번호표를 받은 그들은 한참을 기다린 끝에 번호를 불렸다. 면회접수번호 21번분? 이부키는 손 안에서 꾸깃해진 직사각형의 종잇조각을 번쩍 들고 일어섰다. 네 여기 있어요! 한껏 긴장해서 잰걸음으로 튀어나가는 이부키를 시마가 느린 걸음으로 뒤따랐다. 이부키는 낯익은 교도관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아무렴 지겨울 정도로 찾아왔는데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마주 인사한 교도관이 평소처럼 부루퉁한 목소리로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별일이네요. 만나겠답니다.”
“…네?”
“대신 조건이 붙었어요. 한 사람만 만나겠다네요. 시마 카즈미 씨? 이쪽으로.”
노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시마는 껍질이 벗겨진 고목나무같은 노인의 얼굴을 보며 ‘나라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뿌리가 죽어 양분을 흡수하지 못한 나무는 말라비틀어진다. 인간도 똑같다. 몸보다 큰 죄수복을 입은 가마고오리의 마른 가지같은 팔이나 부러질 듯 굽은 등, 그것들을 보며 시마는 이번이 그가 살아낼 마지막 봄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니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멀어지는 제 팔목을 덥석 붙잡고 하고픈 말이 잔뜩 쌓인 눈빛을 보내는 이부키에게 “알아. 전부 전할게. 여기서 기다려.” 힘주어 대답했던 시마 카즈미가 제 역할을 해줄 차례다. 면회시간은 총 15분, 거꾸로 흐르는 시계 초침이 막 59초로 바뀌었다.
“잘 지내셨냐…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나요?”
“뭘, 세금 낭비하는 늙은이가 잘 지내지 못할 건 뭔가.”
노인에겐 벌써 영락의 계절이 다가온 것 같았다. 발밑에서 마른 낙엽이 바스라지고 찬바람이 다리 사이에 스치는 계절, 홀로 다른 시간대를 사는 남자는 먼지 낀 유리알같이 희끗한 눈동자로 먼 곳을 응시했다. 그러다 조심히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꿈에서 깬 듯 부르르 떨고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선선히 웃는다.
시마 카즈미를 여기까지 안내해준 교도관은 문을 열기 전에 “가마고오리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참고하세요.”라고 말했다. 치매를 앓는 숙부를 겪었던 시마는 그 말을 듣고 내심 각오를 다지며 예상 가능한 모든 상황을 계산에 넣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정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노인은 옅게 웃음 띠고 있다. 시마는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낸다. 그가 기억하는 건 ‘이부키 아이의 파트너’로서의 시마겠지만 겨우 그 정도 피상적인 정보인들 어찌 잊으랴. 숙부님도 숙모님과 조카에 관한 것은 어느 것 하나 잊지 않으려 아등바등했더라.
그는 이부키의 근황을 궁금해했다. ‘이럴 거면 직접 만나지 그랬어요.’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가마 씨는 자길 만나주지 않을 거란 건, 이부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마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해서 몇 년 만에 겨우 말문을 튼 남자의 입술을 조개처럼 다물게 할 수 없다.
“이부키는 어때. 함께 온 걸 보니 여전히 기수야? 그새 사고치고 다른 데로 쫓겨나진 않았지? 걱정이네. 성격 죽이라고 잔소리해도 안 듣는 녀석이라서.”
하지만 말야, 밖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이부키를 생각하면 허투루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고. 시마는 잔잔한 발밑을 콱 밟아 판을 뒤집기로 시도한다.
“…예, 잘하고 있어요. 여전히 시말서 폭탄이긴 해도요, 반듯한 녀석이라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돼요.” 시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후 이어서 입을 연다.
“그렇게 키운 게 가마 씨, 당신이에요.”
아까울 정도로 긴 침묵이 흐른 뒤 노인은 깊은 슬픔과 한탄 섞어 목울대를 울리는 소리는 낸다. 그는 꺼칠한 손바닥으로 주름이 깊게 팬 얼굴을 쓸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외면하고 싶은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물가상승률이나 은행대출이자 같은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좀 더 추상적인 쪽, 예를 들면 산타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 아이의 질문, 물고기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체하다가 저건 이름이 뭐예요? 하는 천진한 물음을 들은 순간. 동심을 지켜줄지 진실을 밝힐지 고민하고 말문이 막혀 대꾸할 말을 잃을 때가 그러하다. 혹은 선생님같은 교사가 되고 싶어서 교편을 잡았다는 제자에게 종이가방 속 돈봉투를 들키는 때와 자신을 이정표로 삼았던 아이에게 실은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하고 난 뒤, 갈 길을 잃은 아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절대로 돌아볼 수 없어 외면한 때 역시 그러하다.
시마 카즈미는 남자가 줄곧 회피하던 문제에 직면하도록 눈앞에 들이밀었다. 당신의 등만 좇으며 살았던 그 애에게 당신도 할 말이 남아있어야 한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핏물이 배어나도록 가혹한 한 마디 대신 남길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자 노인은 낭패 봤다는 듯 허탈하게 웃는다.
“자네도 참 못돼먹은 성격이구만.”
“성격 나쁘단 말은 자주 듣습니다.” 시마가 희미하게 따라 웃는다.
“날 따라 형사가 된다고 했을 땐 그래 해봐! 하며 응원했지만 진짜로 됐을 땐 놀랐어.”
“말한 건 실행하는 아이쨩이니까요.”
“그렇지. 경찰학교 시험을 한 번에 붙은 것도 대단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경찰학교 규율이 여간 엄격한 게 아니잖나. 잘 견디런지 조마조마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더군. 이부키는 내가 걱정하기엔 너무 올바르고 빛나는 애야. 세상이 그 앨 몰라봐도 나는 알고 있었어. 그래서 언젠가 활주로처럼 쭉 뻗은 길이 네 앞에 펼쳐질 거라고 말해줬었지.”
시마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별수 없는 귀착마인은 집 안에 설치된 도청기 하나에도 자책하며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걸었다.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 후회를 거듭하고 영원한 도돌이표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부키는 다르다. 그는 목을 움츠리고 걷는 시마의 뒷덜미를 꽉 잡아채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시작과 끝이 없는 띠 한가운데를 썩둑 자른다. 그리고 심장이 터질 듯이 빠른 스피드로 뛰어 제 파트너를 귀착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선량함으로 똘똘 뭉친 그 애가 아니고서야.
“내가 그 애 인생에 장해물이 되지 않길 바랐어.”
그러니, 누구도 이부키 아이의 장해물이 되지 못한다. 그는 튀어나온 돌부리도 스타팅 블록 삼아 추진력을 얻는다. 넘어져도 맨손으로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뭔갈 움켜쥔다. 그러니, 탄식과 후회로 가득한 한숨을 쉬는 노인이 이제 짐을 내려놓아도 괜찮다.
“알다시피 이부키는 믿을 수 없게 밝고 단단해요.” 시마가 말한다. “상처가 나도 멍울진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전진하죠. 저는 감히 그 녀석을 흉내 낼 수도 없어요.”
그는 코사카가 떨어진 자리에서 멀찍이 물러선 채로 생때같은 목숨이 진 자리를 보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걸음을 돌렸던 6년을 되새긴다. 6년이 지나고야 간신히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손을 올리고 묵은 감정을 토하듯 쏟아냈던 시마 카즈미와 달리 깨질지언정 부딪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돌진하는 이부키 아이의 올곧음은 늘 제 예상을 한껏 뛰어넘는다. 바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인 내 어깨를 툭 쳐서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하는 너, 그리하여 마주 본 것은 네 이름자와 같은 푸른 하늘.
역시 중요한 건 이름이지. ‘통째로 멜론빵’에 멜론 함량은 1%도 되지 않지만 멜론빵이란 이름을 들으면 물렁한 과육과 달콤한 과즙을 떠올리는 것처럼, ‘하늘을 닮은 쪽빛’이란 이름을 가진 형사는 그 이름 그대로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처럼 자랐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레이코 씨에게 들렀어요. 거기서 이부키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시마는 빙그레 입꼬리를 올린다. 뇌리에 도장 찍듯 쾅 박힌 장면과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 제게 맡겨진 파트너의 전언이 드디어 올바른 수신인에게 닿았다.
“만약 저희가 가마 씨를 만나지 못한다면 당신이 꼭, 전해주세요. 저 이제 아저씨를 이해해요. 그러니 어디서 막을 수 있었는지 더는 고민하지 않아요. 하지만 반드시 아저씨와 다른 길을 가볼게요―라고. 알겠죠?”
6.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대기실은 월요일 정오의 공원처럼 고요했다. 이부키는 기도하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시마가 나오길 기다렸다. 면회실 안의 시마에겐 초조할 정도로 빠르게 흐르는 15분이 이부키에겐 150분보다 길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철문이 끼릭―소리를 내며 열렸고 이부키는 벌떡 일어났다. 금일 면회 종료합니다, 예의 부루퉁한 말투로 마감을 알린 교도관이 접수창구의 흰 가림막을 내린다.
철문 밖으로 시마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그 걸음이 파도에 휩쓸린 부표처럼 휘청거렸다. 이부키는 문득, 저를 대신해 시험을 치르고 온 파트너를 꽉 안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시마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행동으로 옮겼다. 뒷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어깨에 끌어안자 조금 머뭇대던 두 손이 이부키의 등 뒤에 살포시 얹어졌다.
평소였다면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밀어냈을 시마 카즈미지만 여기는 자신과 제 연인 외에 아무도 없었고, 설령 누가 있었다 해도 이부키에게 얌전히 안겼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든지 그래도 된다는 불문율 같은 게 있다. 누구든 눈앞의 사람에게 안겨도 된다는 규칙.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혹은 완전한 타인이라도.
“완전 지쳤어.” 겨우 내뱉은 말의 끄트머리가 흔들렸다.
“응응, 알아. 고생했어.”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정하게 대답한다. 시마는 손가락 끝에 힘을 준다. 조금 떨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부키는 우는 아이를 달래듯이 시마의 머리를 천천히 토닥거렸다. 그는 가끔씩 누군가를 돌보는 데에 아주 능숙한 사람처럼 굴었다. 둘 중에 아래로 동생이 줄줄이 딸린 사람은 시마 쪽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부키는 받아본 적 없는 애정을 잘도 베풀었다. 이러니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냐고. 분에 넘치는 행복을 마다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네 말, 전부 전했으니까.” 시마는 갈라지는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었다.
“믿고 있었어. 고마워 시마.”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그는 한 치의 의심 없이 기다렸다. 시마는 늘 어떻게든 해주니까. 전하지 못했어도 ‘시마니까’ 그럴 이유가 있었을 거다. 시마를 향한 제 신뢰는 1000퍼센트다.
곧이어 시마가 스르륵 손을 풀었다. 이제 놓아달라는 신호를 기막히게 알아들은 이부키가 제 몸을 떼어낸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고 서로의 표정을 닮아가듯 활짝 웃었다.
“이제 돌아갈까.”
“좋아. 참, 시마! 우리 결혼 얘기는 전했어?”
“당연하지. 청첩장도 주고 왔다고.”
“뭐래?”
“그냥…웃으시던데.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헤에, 역시 은퇴해도 형사.”
손을 잡고 걸어나가는 그들의 발밑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는 하나로 굳게 연결되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개의 그림자가 떨어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처럼.
7.
계절이 흘러서 봄이 여름으로, 여름이 가을으로 바뀌었다. 그 사이 이부키와 시마는 하나의 호적으로 묶였고 꿈같은 신혼여행을 다녀왔으며 더는 미룰 수 없는 인사발령에 몸을 맡겼다. 4기수에서 별탈없이 3년을 채운 그들은 서로 다른 부서로 배치받았다. 공무원 부부는 같은 부서에 있을 수 없으니 기수404로 지낸 시간이 그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파트너로 불린 시간이 될 것이다. 이부키는 2박3일 동안 서운함을 토로했다. 인내심에 한계가 온 시마는 이부키에게 버럭 화를 내는 대신 경찰철에서 근무하는 코코노에에게 냅다 전화를 걸었더라. 그딴 낡아빠진 규정 좀 어떻게 해보라고. 그걸 듣고서야 이부키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을 멈추었다.
또한, 그들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시마의 멘션은 두 사람이 살기에 적절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일부러 3명이 살만한 집으로 찾았다. 언젠가의 미래에 그들에게 작은 가족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 날 아침, 이부키는 유난히 일찍 눈을 떴다. 누군가가 거칠지만 따뜻한 손길로 제 머리카락을 헝클고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부키는 물 한 잔을 마시고 소파에 앉아서 점차 보랏빛으로 밝아오는 하늘을 멍하니 보다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울음소리에 잠에서 깬 시마는 눈물로 번진 얼굴로 저를 돌아보는 이부키를 보고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뭔가가 다가왔음을 직감하여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고 아주 오랫동안 이부키를 안아주었다.
가마고오리 시게오는 잠들 듯이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유품으로 받은 상자는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가벼웠다. 체포 당시 입었던 옷가지 몇 개와 알약이 든 약병, 그리고 삐뚤한 손글씨로 ‘이부키에게’라고 적혀 있는 한 장의 편지. 이부키는 그 편지를 내내 간직하다가 가마고오리의 장례가 끝나고 그를 제 아내의 뼛조각 옆에 나란히 안치한 후에야 펼쳤다.
한 장짜리 길지 않은 편지는 유언이라기에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이야기로 채워졌다.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한 고해와 사죄, 감사 등을 담아서 제 맘만큼 움직이지 않는 손을 다그쳐가며 썼을 편지였다. 시마는 자리를 피해줄 필요를 느꼈지만 이부키가 그를 붙잡았다. 같이 읽자, 카즈미. 옆에 있어 줘.
그렇게 두 사람은 많은 일을 함께하였다.
편지에는 몇 개월 늦은 결혼 축하가 있었다. 그리고 ‘넌 역시 나보다 나은 형사가 될 줄 알았다.’는 대견함과, ‘내가 네 짐이 된 줄 알았는데 네가 내 짐을 덜어 줬다.’는 감사와, ‘시마 군을 너무 괴롭히진 마. 나중에 크게 후회한다.’ 기혼자의 뼈있는 충고까지. 행간을 빽빽하게 채우는 애정을 느낀다. 그래서 이부키는 웃었고 또 울었다. ‘지금 울고 있으면 눈물 뚝 그쳐.’ 마침 그를 지켜본 듯이 이어지는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네가 아주 잠시만 슬퍼하면 좋겠다. 앞으로 남은 행복할 날을 슬퍼하며 보내지 마라.
누군가는 사는 게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마는 그 말에 동의했다. 삶과 죽음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결승점을 향하는 달리기의 일보(一步)다.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밀어도 방아쇠를 당기는 까닭은 자신이 죽어가는 중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마 카즈미는 앞으로도 삶에 미련을 두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여전히 위스키를 마시지 못하고 수년 전에 죽은 파트너에게 헌화하지 못했다. 그처럼 오래 슬퍼하는 사람은 영원히 가마고오리의 마지막 전언을 이뤄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편지를 모두 읽고 후련한 얼굴로 웃는 이부키에겐 그리 어려운 요구가 아닐 것이다. 그는 삶을 오로지 삶으로서 살아간다. 달리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고, 그저 달리고 싶으니까 달린다는 허무할 정도로 명쾌한 대답을 내놓는 사람은 슬픔을 오래 간직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내년 봄에는 그의 머리 위로 내리던 소나기가 그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부키가 어떤 형사가 될지 염려한다면, 걱정은 필요 없다. 그는 모든 걸 품는 하늘, 결국에 빛날 태양이니까.
후기
a fond adieu는 즐거운 작별인사, 라는 뜻이래요. 내용과 어울리지 싶어 제목으로 선정했습니다.
안녕하세요, MIU404 첫 회지를 트윈지로 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심지어 둘이서 지지고 볶는 내용도 아님. 이거 커플링책으로 내도 되는 내용이냐고 파트너에게 원고 내내 주절댔는데 가온뉘님이 용기를 주셔서 무사히 완성했네요. 가온뉘님 없었다면 이 글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겠죠. 정말 감사합니다U_U
면회 가는 내용은 꼭 써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이부키가 가마상을 만나진 못하더라고요. 하지만 이부키에겐 시마가 있으니까 시마를 통해 이 둘이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하고싶은 말을 무사히 전달했기를...
원고를 하며 8화부터 11화만 20번은 본 것 같은데, 볼수록 이부키의 성장서사가 완벽하더라고요. 성장통 제대로 겪고 과거에서 한 발짝 전진한 이부키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전달력이 부족해서 보시는 분들이 잘 알아봐주셨을까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하고 싶은 걸 했고, 오랫동안 고민하고 고통받으며 쓴 만큼 흡족한 글이 만들어져 저는 나름 만족합니다. 이부키 최애인 오타쿠가 이부키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힘껏 캐해석한 결과물이라 생각해주세요.
다음에는 시마 쪽에 좀 더 중점을 둔 뭔갈 해보고 싶네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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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시마]자전의 방향
*미완이지만 아마 완성 안할 듯
"저 사람은 누구?"
"△△기업 총수."
"저 쪽은?"
"도로교통과 부장님."
"시마는 어떻게 다 알아?"
"네가 너무 모르는 건 아니고?"
코코노에 요히토가 결혼을 한다. 경찰청 형사 국장의 아들의 결혼식인 만큼 식장에 들어오는 인물들의 면면이 대단했다. 경찰청 장관부터 시작해서 온갖 부장들이 줄줄이 대단하신 걸음을 하셨다. 식장 입구에 서서 뻣뻣하게 인사하는 전(前) 4기수의 막내를 구경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파트너의 질문을 받아주던 시마는 신랑보다 신랑의 아버지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결혼식의 주인공인지 헷갈린다는 생각을 했다. 연애결혼을 할 줄 알았던 코코노에는 예상 외로 소개 받아 만난 여자와 꽤 오랜 기간 만나다가 결혼까지 골인했다. 신부 측도 대단한 기업 가문의 고명딸이랬다. 그래서인지 TV에서나 보던 경영인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화려하네. 그런데 이래서야 아버지들끼리 결혼하는 게 낫지 않나? 지금 신랑신부보다 부모님 쪽에 손님이 더 많은데. 아무리 결혼이 양가의 결합이라 해도 주객이 전도된 작금의 상황이 시마는 우습기만 했다.
도쿄에서 제일 크다는 호텔에서 진행하는 결혼식에는 청첩장을 받은 사람과 그가 데려오는 파트너만 올 수 있다고 했다. 보통은 청첩장을 받은 당사자와 그 배우자가 함께 출석한다. 혹은 결혼을 약속한 연인, 또는 가장 친한 친구. 그만큼 격식 있고 웅장한 결혼식이었다. 따라서 시마는 평소보다 신경을 써서 옷을 차려 입었다. 제게 정장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T.P.O를 알았고 키쿄 씨의 운전기사를 때려친 후로 옷장 한 구석에 비닐을 씌운 채 방치했던 정장을 꺼내 입었다. 와이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푸른 빛이 도는 넥타이를 조여 매고 빳빳하게 다린 자켓을 걸친 제 모습이 어색해서 몸을 뒤틀고 손목 단추를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덥수룩한 곱슬머리는 어떻게 손질을 해도 더 부풀기만 할 뿐이라 최대한 단정해보이게 정리하고 이만하면 됐지, 생각하면서 나왔는데.
시마는 제 옆에 나란히 서서 쉴새없이 종알대는 파트너를 흘끗 쳐다봤다. 그리고 인터넷에 흔히 돌아다니는 '반전 썰'이 실제가 되어 나타난 파트너의 모습에 재차 감탄했다. 평상시 데님자켓에 체크 셔츠, 달리기 편한 트레이닝 바지와 러닝화를 주로 입고 눈에 닿을 정도로 긴 앞머리가 제멋대로 뻗도록 내버려 뒀어도 미남 소리를 듣던 파트너였다. 깔끔하게 앞머리를 넘겨서 훤칠한 이마가 드러나자 이목구비가 더 또렷해져서 한층 미모가 살아났다. 짙은 남색에 얇은 실선이 들어간 쓰리피스 수트가 기막히게 잘 어울렸다. 실용성을 강조한 스마트워치를 벗고 그 자리를 두께감 있는 은색 아날로그 시계가 대신했다. 멋내기 안경을 포기한 대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실컷 멋 낸 그의 파트너는 누구나 한번쯤 돌아보게 만들었다. 까르르 웃으며 몇 번째인지 모르게 그들의 앞을 스쳐지나가는 여자들 사이에서 완전 내 취향, 이라는 말이 언뜻 들렸다.
분명 이부키도 들었을 텐데. 귓가에 걸리기 직전의 입가를 갈무리하지 못하고 히죽대고 있을 줄 알았던 이부키는 예상 외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어린애같이 심통난 얼굴이었다. 일련의 무리가 다시 그들의 앞을 지나칠 때, 이부키가 한 발 앞으로 나와 시마를 제 등 뒤로 보냈다. 말랐지만 저를 가리기에 충분히 넓은 어깨가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하? 뭐하냐?"
"뭔가 기분 나빠! 사람들이 자꾸 힐끔대잖아. 이건 다 시마 때문이야."
"야, 그건 내가 아니라 네가..."
"됐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다.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입을 부우 내민 이부키는 나이를 거꾸로 먹은 게 분명하다. 서른 후반의 아저씨가 초등학생인 유타카보다 유치했다. 바보같긴, 왜 자기가 기분이 나쁜 지 이유도 모른 채로 박박 짜증내는 파트너를 보는 심장 한 켠이 쓰라렸다. 이다지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한 감정을 왜 모를까, 저 바보.
코코노에는 결혼 전 이부키와 시마를 한 자리에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예비 신부가 동석하여 청첩장을 건네주는 그 자리의 의미를 아는 시마와 다르게 이런 만남 자체가 처음인 이부키는 마냥 신나서 예비 신부에게 코코노에의 부끄러운 과거를 마구 풀어댔다. 이부키 씨 제발 그만! 시마 씨, 좀 말려주세요! 코코노에의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서는 처량하게 시마를 바라봤다. 그러나 길들인 야생 들개의 고삐를 잡고만 있을 뿐 당길 생각이 전혀 없던 시마가 아, 그러고보니 그때...하며 운을 띄워 코코노에 놀리기에 동참했다. 두 사람의 폭로전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뒷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여자친구의 조합에 너덜너덜하게 당한 코코노에가 벌떡 일어나 저 화장실 좀...하며 휘청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에, 큐쨩 도망치는거야? 멀어지는 등에 대고 소리치는 이부키가 여자와 마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여자와 이부키는 텐션이 잘 맞았다. 만약 코코노에의 여자친구이자 곧 아내가 될 사람이란 걸 몰랐다면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사고가 닿은 시마의 웃음이 어색하게 바뀌었다. 그는 쉬지 않고 수다를 떠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나도 화장실, 하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시마? 의문을 담은 목소리가 따라붙었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 코코노에가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중이었다. 물기를 털어내는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자 감사합니다, 예의 바른 인사가 돌아왔다. 시마는 은은한 아이보리 색이 도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벽에 느슨하게 기대어 팔짱을 꼈다.
"언제부터 알았어?" 주어가 없는 물음이었지만 코코노에는 그 속에 감춰진 말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렇게 티내고 다니면서 모르길 바란 게 이상해요. 진바 씨 정도 연세의 아저씨들은 그런 관계, 상상도 못할테니 모를 수 있지만 저는 생각보다 어리거든요."
거울에 비친 코코노에가 마른 손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거야 원, 한때 4기수에서 제일 눈치없는 사람 투표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코코노에에게 제일 먼저 걸렸다니. 그렇다. 결혼 예정인 남녀가 굳이 두 사람을 불러 한 장의 청첩장을 주면서 결혼식에 참석해달라고 초대하는 건 두 사람을 한 쌍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면 두 장의 청첩장을 각자에게 건넸을 것이다. 더욱이 코코노에의 결혼식은 청첩장을 가진 사람과 그의 동행자만 올 수 있는 초호화판 결혼식, 때문에 그들 앞에 내밀어진 한 장의 청첩장에 시마는 코코노에가 그들 사이에 흐르는 파트너 이상의 미묘한 기류를 읽었음을 확신했다.
"네가 보기엔 내가 이부키와 사귀는 사이 같아?"
"물론이죠."
망설임따위 없는 즉답에 시마가 눈을 내리깔고 푸훗, 소리내어 웃었다. 의미가 불분명한 반응에 코코노에가 시마를 곁눈질했고 떫은 것이 혀에 닿은 사람처럼 텁텁함이 맴도는 시마의 얼굴에 그는 이유를 해석하기 위해 수 초간 침묵했고 번뜩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느닷없이 와악! 소리를 질렀다.
"설마, 아니에요?"
"좋아하는 건, 맞아. 아마도 쌍방."
아, 다행이다. 코코노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좋아하는 선배들에게 큰 실수를 한 줄 알았다.
"이부키가...자기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
"이부키 씨는 진짜 바본가요?! 저도 아는 걸 어떻게 몰라?!"
-
"...이로써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부부의 앞날을 모두 축복해주시기 바랍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주례가 끝났다. 시마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졸음을 참느라 허벅지에 손톱을 박고 견뎠다. 그럴 수 밖에 없다. 24시간 당번 근무를 끝내고 겨우 2시간이나 잤을까,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잠이 처절하게 부족한 상태로는 결혼식이 아니라 장례식에서도 졸고 말 것이다. 그에 반해 동갑인 파트너는 상쾌하다 못해 쌩쌩했다. 억울하다. 나도 어디가서 체력 부족하다는 말 듣진 않는데. 역시 타고난 지구력의 차이 때문인가. 확실히 오래 버티는 힘은 시마보다 이부키 쪽이 한 수 위였다.
직장 동료들과 사진을 찍을 차례가 되자 이부키는 신나게 달려나가 코코노에의 뒤에 섰다. 시마 짱, 빨리와. 여기여기!! 손을 휘휘 젓는 이부키 옆에 서고 보니 키가 맞지 않는다며 이부키가 줄의 맨 끝으로 밀렸다. 그 많은 하객 사이에서도 그는 월등한 기럭지를 자랑했다. 나란히 사진에 찍혔으면 좋았을텐데, 시마는 다소 아쉬웠다. 가장자리로 밀려나고도 좋은지 실실 웃어대는 얼굴을 곁눈질로 보다가 거기! 카메라 보세요! 하는 말에 얼른 눈을 돌렸다.
순식간에 사진을 찍고 단상에서 내려가던 시마의 옷자락을 누군가 꾹 잡아당겼다. 이부키겠거니, 돌아본 시마는 연한 갈색으로 물들인 단발 머리카락의 낯선 여자의 상기된 표정을 마주하고 어리둥절해졌다.
"저기...괜찮으시면 연락처 교환하지 않을래요?"
떨리는 목소리로 명함을 내미는 여자 뒤에서 한 무리의 여자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시마는 이들이 식장 앞에 선 이부키와 시마 앞을 몇 번이고 지나쳤던 그 무리라는 걸 기억해냈다. 이부키를 보는 줄 알았는데 진짜 나였어? 언제나 생각하지만 짐승에 가까운 이부키의 감은 무시무시하다. 시마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 말인가요? 되묻자 여자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코코노에군에게 시마 씨 여자친구 없다고 들었어요. 맞죠?"
이 자식이. 내 이름까지 알려줬단 말이야? 시마가 코코노에를 흘겨보자 어리버리하게 허둥대던 새 신랑이 가슴 위로 커다랗게 엑스자를 만들고 몇 시간동안 공들여 손질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질 정도로 부정의 사인의 보낸다. 시마의 눈썹이 꿈틀댄다. 뭔 뜻이야 저게. 하여간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거 아니라는 옛 사람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내가 누굴 좋아하는 지 다 알면 재주껏 중간에서 잘라줘야지. 그런 요령 좋은 짓을 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님을 알면서도 투덜댔다.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그것도 들었어요! 그래도 아직 사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저, 저랑 밥 한 번만 먹어요!"
시마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낭패다. 문제는 이쪽이었나. 골키퍼 있다고 공이 안들어가나! 하는 고집이 센 쪽. 참나, 나는 애초에 그 쪽이랑 게임을 시작할 생각조차 없습니다만. 신부측 지인으로 왔으면 이 대담무쌍한 아가씨도 내노라하는 집안의 따님일테니 살면서 남자에게 거절당해본 경험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시마 카즈미는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두 눈 부릅뜨고 돌아다니는데 남의 연락처를 받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단호하게 거절해서 여지를 남겨두지 않겠다 다짐하고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죄송해요, 이 사람이 부끄럼이 많아서. 제가 대신 받아드릴게요."
예측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 시마 카즈미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이 여자의 명함을 받았다. 그 명함은 시마의 정장 자켓의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시마의 전화번호는...이쪽. 기억하고 있는 번호를 빠르게 적어서 여자에게 전해주자 감사합니다, 연락할게요! 꾸벅 인사하고 친구들 쪽으로 달려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웃는 낯으로 보던 이부키의 시선이 시마를 향한다. 시마는 뒷골이 싸해졌다. 이게 뭐지? 무슨 뜻이지? 나더러 저 여자와 연락을 주고 받으란 거야? 너, 그래도 상관없어? 아무리 무자각이라지만 여자들이 나를 훔쳐본다고 제 등 뒤로 감출 땐 언제고 이제와서 연락처를 대신 받아?
"뭐하는 짓이야?"
"응? 시마에게 관심이 있다잖아. 한 번 만나보면 어때?"
"......너 지금 그 말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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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U404X아발란치 무언가의 짬뽕
*이부시마+하부
1.
우리의 역할은 여기까지다.당신의 죄가 어떻게 심판받아야 할지는 이 영상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맡기겠다.
아침부터 시바우라서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보이는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인사하던 시마는 삼삼오오 모여 자못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는 분위기에 멈칫했다. 나만 모르게 무슨 일이 있었나? 시마는 뒷목을 긁적이며 분주소로 들어갔다. 이쪽도 분위기가 같았다. 그는 머리를 맞대고 있는 기수 401과 이부키 쪽으로 걸어갔다. 빨려들어갈 기세로 어떤 영상을 시청하는 이부키의 어깨를 툭툭 치자 왓, 깜짝이야! 하고 놀라서 뒤로 자빠질뻔한 파트너를 붙잡았다.
"무슨 일 있어?"
"시마짱, 이거 봤어?"
이부키는 흥분에 찬 얼굴로 핸드폰 속 영상을 가리켰다.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앵글 속에 묘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걸었다.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은 중년의 남성이 허둥지둥 카메라를 끄기 위해 달려가다가 화면 가득 얼굴이 잡힌다. TV에 가끔 나오는 기업인이었다. '도쿄 리버스 프로젝트 2030' 담당자였던가. 비상한 기억력이 중년 사내를 알아봤다. 늦게 합류해서 전후 사정을 모르는 시마에게 진바의 새로운 파트너인 코우지가 간략히 요약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갑자기 담당자가 바뀌었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시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짓으로 물었다.
"이 가면은 누구?"
"아직 몰라. 테러 집단인지 자경단인지."
진바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명분은 정의 구현이지만 속사정을 누가 알겠냐며, 노련한 형사 진바 코헤이는 정의다 아니다 투닥대는 코우지와 이부키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한 번 영상이 송출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어.'
가면 아래 웅웅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시마의 미간이 무언갈 떠올릴 때 그러하듯 바짝 좁혀졌다가 이내 펴졌다. 기억에 있는 목소리인데, 어디서 들었더라. 시마가 기억을 더듬는 동안 이부키가 등을 의자에 대고 팔을 위로 쭉 뻗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난 아발란치 편~ 뭔가 정의의 편 같아."
아, 그 말에 떠올랐다. 그 사람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났던 그는 단정하던 옛 모습은 갖다버리기로 했는지 양쪽 귀에 피어싱을 뚫고 폭탄이라도 맞은 양 복슬거리는 머리카락을 하고는 특유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시마를 찾아왔다. 정의를 실현하자며.
시마는 자신이 정의라고 하는 사람이 가장 싫었다. 정의는 어떠한 숭고하고 고결한 가치관이 아니다. 모두에겐 각자의 정의가 있다. 심지어는 범죄자에게도.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가치관에 불과하다.
"시마는 어떻게 생각해? 아발란치."
"글쎄... 난 자신이 정의라고 하는 사람들은 싫어서."
"아, 그런 스탠스였지? 난 응원하고 싶은데 말야."
"네네 그러세요."
"너 지금 바보같다고 생각했지?"
이부키가 발끈하며 일어나서 따지고 들려 하니 진바가 요령 좋게 중간에서 막아선다. 자자, 그만하고 일하러 가자, 일! 이부키의 등을 떠밀어 먼저 분주소에서 내보낸 진바가 뒤따르는 시마의 어깨를 잡았다.
"왜 그러세요?"
"위에서 난리야, 아발란치때문에."
"아...아무래도 그렇겠죠."
"혹시 아는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제가 뭘 알겠어요." 시마는 웃으며 말했다. 남자의 이름, 나이, 이전 직책까지 알고 있으나 모든 걸 꿀꺽 삼키고 뻔뻔스럽게 행동했다. 이부키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감이 좋은 파트너였다면 시마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단박에 눈치챘을 테니.
당신의 정의가 뭐냐고 묻는 시마의 말에 남자는 푸스스 웃었다. 여전하네 시마군, 사람을 조금은 믿어봐. 그는 예전보다 훨씬 잘 웃었지만 어쩐지 웃음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을까했던 시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저 눈사태같은 남자와 얽혀서 고생하는 건 늘 자신이었다.
'경찰은 그만뒀습니까?'
'응? 아아, 사정이 있어서.'
'저는 계속 경찰 할건데요.'
'의외네, 그만두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
남자는 뜻밖이라고 했다. 이제는 그만두면 안될 이유가 생겼거든요. 그는 자신의 부메랑을 생각한다. 너무 빨라서 혼자 내버려둘 수 없는 파트너를 떠올린다. 칼같은 거절에 남자는, 하부 세이이치는 늘 그랬듯 깔끔하게 물러났다. 너와의 페어, 꽤 잘 맞았는데 아쉽다.
그래, 잘 맞았다는 말은 인정한다. 세상에서 저보다 잘난 사람은 없는 양 오만하고 콧대 높게 살았던 시마 카즈미조차 인정한 사람이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시마의 마음을 훤히 읽고 제때 움직여주는 파트너는 편리했다. 그러나 드러내지 않은 속내까지 파헤치고 다 안다는 듯이 구는 그의 태도에 시마 카즈미는 밑천을 다 까발려진 도박꾼처럼 너덜너덜해졌다. 게다가 이따금 하부는 이부키 이상으로 충동적인 행동을 했다. 차이점이라면 이부키는 생각보다 몸이 빨랐다는 거고 하부는 그마저도 철저하게 계산하고 움직였다는 점이다. 정말이지 버거웠다. 수사 1과와 공안의 공조수사가 끝난 날 하부와 시마는 함께 술을 마셨고, 언제든 도움이나 조언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내민 개인연락처를 시마는 있는 힘껏 구겨서 하수구로 흘려보냈다.
그 후로 만날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진실을 바로잡고 정의를 실현하겠다, 라. 아발란치의 역사적인 첫 행보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사람들의 새로운 영웅의 등장, 정의구현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시마는 역시,
"시마! 얼른 나와 문단속!"
"네네 지금 갑니다."
제 일상 속의 작은 영웅 쪽이 더 좋았다.
2.
시마군, 오랜만~
세상사는 늘 시마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저녁 노을이 지는 시간, 시마가 사는 멘션의 공동 현관문에 기대어 서서 담배 피우던 검고 길쭉한 사람 그림자는 시마를 알아보고 손을 살랑 흔들었다. 저 사람 실종됐다지 않았나. 시마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하부의 주위로는 흰 담배연기가 퍼졌다. 그의 발 주변에 떨어진 꽁초가 수북했다. 담배냄새에 코끝이 찡했다. 여전히 골초네. 미간이 절로 찌푸러들었다. 실종됐다던 사람이 이유도 없이 그를 찾아왔을 것 같진 않지만 마음같아선 그를 무시하고 들어가고 싶었다. 지독한 담배냄새가 끔찍했다.
"시마, 아는 사람이야?"
문제가 있었다. 시마는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덩달아 걸음을 멈춘 이부키가 물었다. 한동안 TV며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하부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던 이부키는 곧 그를 알아보고 어?! 하고 소리친다.
"아발란치? 하부 세이이치 씨 맞죠? 우와아, 팬이에요."
"야 이부키, 가까이 가지마."
팬일 것까지야 있나 싶다. 꼬리를 마구 흔들며 하부쪽으로 다가가려는 이부키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었다. 경계하는 태도에 하부가 방긋 웃었다.
"새로운 파트너? 제법이네 시마군. 다신 연애 안한다며."
"또 그렇게 남을... 됐습니다. 앞으로 볼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차갑게 그러지 말고. 잠시 나랑 얘기 좀 할까? 아직 담배 피워?"
"시마, 담배 피웠어? 잠깐, 그 쪽은 어떻게 아는데요?"
"난 시마군에 대해 다 알지."
"듣는 사람 오해할 말 하지 마세요."
하부는 장난끼가 많은 남자였다. 남을 놀리는 데 얼마나 진심인지 당해본 사람만 안다. 그의 입에서 더 한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입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시마가 공동현관문을 열고 이부키를 들여보낸다.
"이부키, 먼저 올라가서 기다려. 잠깐 얘기하고 들어갈게."
"싫어. 내가 보는 데서 얘기해."
"들으면 질투날텐데~"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란 겁니다, 하부씨."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이부키는 천천히 닫히는 투명문 너머로 사라지는 둘을 불안한 눈으로 끝까지 지켜봤다.
3.
잠깐 얘기하고 돌아온다던 시마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이부키는 초조하게 메신저를 들여다봤다.
[시마 언제와?]
[내가 갈까?]
[나오기 힘들면 전화해줄게!]
.
.
.
답장은 커녕 읽음 표시도 뜨지 않는 메신저만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시간은 벌써 9시를 넘어갔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이부키가 벌떡 일어섰다. 기다리라는 시마의 말에 유효기간은 짧았다. 이부키가 막 신발을 신는 순간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이부키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시마!"
"여, 안녕?"
행복하던 공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눈을 가릴 정도로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일부러 기른 수염의 남자 품에 잔뜩 취한 시마가 거의 안기듯 기대어있다. 퓨즈가 나간다는게 이런 건가, 순간 눈이 돌아간 이부키가 하부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챘다. 하부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멱을 잡히고도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시마에게 무슨 짓을 했어."
"맞춰볼래?"
"너 이 자식..."
"그 전에 이것 좀 놓지? 얘 이래봬도 꽤 무게가 나가거든."
이부키의 눈동자가 시마의 허리를 단단히 감은 남자의 팔으로 향한다. 남자가 부축하지 않으면 곧 쓰러질 것처럼 연신 휘청이는 시마를 보고 머리털이 곤두설만큼 화가 났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그만큼 편한 사이야? 시마 원래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잖아... 화가 머리 끝까지 나자 뜬금없이 눈물샘이 고장났다. 안경을 벗고 눈가를 북북 닦는 이부키를 보고 하부는 아차했다. 헐, 지 애인 울렸다고 하면 날 가만 안둘텐데. 더 놀렸다간 그 시마 카즈미가 총을 뽑아 제 머리에 겨누는 기적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하부는 짐짓 태연하게 웃으며 시마를 이부키에게 떠넘겼다. 시마에게서 진한 술냄새가 풍겼다. 이부키가 시마를 고쳐 안을 동안 하부는 현관에 팔로 기대선 채 히죽히죽 웃었다.
"꼬셨는데 안 넘어오더라? 파트너 씨가 잘 챙겨주나봐."
"어이, 너 말 조심해."
"선배한테 그런 말투는 안되지. 앞으로 같이 일할지도 모르는데?"
"뭐?"
"그렇게 됐다. 그럼 담에 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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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부는 시마를 적당히 귀엽고 똘똘한 후배정도로 생각합니다. 워낙 장난끼 가득하고 남 놀리는 데에 진심이라서 이부키가 날 세우고으르렁거리니까 놀려주고 싶었던 거에 불과하고 하부와 시마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저는 이부시마 좌우고정입니다)
시마가 수1 시절에 너무 바빠서 여자친구에게 차인 뒤 하부에게 하소연하며 두 번 다시 연애 안할거라고 울었던 전적이 있으면 좋겠네요. 하부는 뭔가 이부키의 행동력+시마의 두뇌 합쳐진데다가 능글함+빠그라짐이 섞인 캐같아요. 하부가 경찰관으로 복직해서 이부시마 다시 만나서 또 실컷 가지고 놀면 좋겠네요 적폐맛이 달고 맛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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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부시마]불길한 이름
※파트너 죽이기란 별명을 이부키가 알고 있었다면.
시마 카즈미입니다. 이부키 씨와 팀을 짜는 404호차의...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체구가 작은 남자는 눈매가 둥글고 머리카락도 둥글었다.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 이부키가 생긋 웃으며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부키 아이입니다. 기수는 처음이니 많이 가르쳐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도로에 익숙해지고 싶으니 자신이 운전하겠다는 파트너의 억지에도 남자는 가타부타 말없이 핸들을 넘기고 대신 무전기를 잡았다. 역시나 기동수사대 경력직답게 남자는 능숙하게 본부에 404호의 출범을 알렸다.
시니컬하고 모든 일에 사무적으로 구는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시작부터 좌충우돌이었던 기수 404의 첫 날 내내 남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이부키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려 애썼다. 이제껏 많은 파트너가 그와 일한 첫 날부터 못해먹겠다며 화내며 떠났던 것을 생각하면 시마 카즈미는 인내심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이부키 아이는 생각했다. 파트너 죽이기란 별명에는 커다란 오류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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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기동수사대를 4부제로 바꾼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게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꿈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이부키 아이는 출근하자마자 본청에서 내려온 이동 명령 소식에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툭 떨어트렸다. 진짜 저에요? 저 맞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신의 목소리로 되묻는 이부키에게 파출소장이 대답했다. 오쿠타마에 이부키 아이가 두 명이나 있으면 난 진작에 사직서를 냈을 거야.
이미 파트너의 이름까지 나왔다. 알고 보니 누군가가 낙하산으로 기동수사대에 들어오는 바람에 연쇄 충돌로 생긴 빈 자리에 자신이 들어간 거였다. 이부키에게 그런 사정이야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드디어 시골 생활 청산이다! 이부키는 신나게 짐을 쌌다. 이제는 성격도 죽여야지. 서른 다섯이나 먹고 패기넘치는 20대 시절처럼 용의자에게 주먹질하고 총부터 뽑아들어선 안된다. 어쩌면 기동수사대에서 끝내주는 공을 세우는 바람에 초야에 파묻힌 엘리트를 이제야 알아봤다며 수사1과로 올라가는 거 아냐? 야생의 들개가 기대감으로 가슴을 잔뜩 부풀렸을 때 옆에서 혀를 쯧쯧 차던 파출소장이 말했다.
"죽지나 마. 네 파트너, '파트너 죽이기'로 명성이 자자해."
"그게 뭔데요? 귀신 죽이기같은 거?" 이부키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파출소장이 고개를 두리번댔다. 어차피 두 사람뿐인 시골 촌구석 파출소에서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봐 겁나는 표정이었다. 중년의 경찰이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그런 게 아니라 그 녀석, 파트너를 죽였다고."
"예? 그럴리가. 사람을 죽였는데 경찰을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소문이긴 하지만. 아무튼 불길한 이름이야. 시마 카즈미 녀석."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소문이었다. 수사 1과 시절 시마 카즈미는 파트너를 죽였으나 증거 부족으로 구속되지 않았고 대신 한직으로 좌천. 사실상 권고사직이나 다름없는 자리로 내려가고도 무슨 낯짝인지 뻔뻔하게 경찰 노릇을 계속 하고 있다고. 이부키는 시마 카즈미를 아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그에 대해 물었다. 시마 카즈미는 어떤 사람이냐고 질문하면 약속한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이름을 혀 위에 올리는 것만도 꺼림칙하다는 듯이 굴었다. 그들의 평가에 따르면 시마 카즈미는 능력은 출중하나 제 잘난 맛에 살았고, 어딘가 쎄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역시 뒤가 구렸으며 그가 파트너를 살해한 건 기정 사실이었다.
살인마, 싸이코 등등 그를 향해 쏟아지는 멸칭을 들으며 이부키 아이는 불현듯 자신의 과거에 붙여진 이름을 떠올렸다. 양아치, 불량아, 가난뱅이 도둑새끼... 그가 아무리 벗어나려 노력해도 떨쳐지지 않던 무한한 꼬리표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들이 씌워둔 프레임으로 평가하던 어른들과 뒤따라다니던 소문들을 생각했다. 평생 소문때문에 피해를 봤던 이부키는 어쩐지 아직 얼굴도 본 적 없는 파트너의 편을 들고 싶었다. 경찰에게 동료 살해죄는 혐의만으로도 불명예였다. 이 직업이 불명예를 짊어지고 버틸 정도로 대단한 직업은 아니었다. 용의자를 때리면 과잉진압으로 언론의 지탄을 받고 좌천 엔딩, 신호위반하는 차를 세웠다 하면 공권력 남용이라며 침을 맞는다. 수사 1과에 들어갈 정도의 능력치라면 경찰을 그만두고 뭘 하든 먹고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경찰로 남기를 선택했다면, 누군가는 그 이유를 물어봐야하지 않는가.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에 넌 오래 살아, 뜻 모를 말을 건넨다면 그 사람은 지금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반드시 되돌리고 싶은 그 시간을 떠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부키 아이는 전력으로 제 파트너의 편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시마 카즈미의 이름을 불길함의 상징으로 마무리짓지 않기 위해 전력으로 막을 것이다. 그는 단순무식함을 무기로 달려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을 들으면 어떤 사람은 진실을 채 숨기지 못하여 말문이 막힌다. 아무리 솜씨 좋은 거짓말쟁이라도 순간 드러나는 진심은 감추지 못한다.
야생에 가까운 직감을 가진 형사라면 그 진심을 낚아챈다. 그리고 어느 날, 노을지는 옥상 위에서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끝나지 않는 파트너의 악몽에 종지부를 찍어 줄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도록 결정되어 있는 동화책의 마지막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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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를 다시 보다가 시마가 그랬듯 이부키도 시마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이부키는 과거 내내 헛소문에 시달리고 피해를 봐서 시마를 둘러싼 오해, 소문을 오히려 믿지 않았을 것 같아요. 내가 반드시 진실을 캐내어주지! 라는 자세가 되어 결국 6화같은 엔딩을 만들었을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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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시마]크리스마스엔 당번 근무를 합니다
거리는 어딜 가나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했다.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풍경과,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인파를 시마는 별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 할로윈이었는데 말이지, 다들 이벤트 참 좋아하네.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이부키가 씨익 웃었다.
"그래도 좋지 않아? 크리스마스 무드. 뭔가 마음이 두근-하게 되잖아?"
"그럴 나이 지났습니다."
"무슨 소리야 시마. 우린 아직 한창이지."
적어도 나는 두근거려. 시마랑 24시간 밀착 데이트...아얏! 은근슬쩍 시마의 손을 잡으려고 꿈틀대며 건너온 이부키의 손등을 찰싹 때리고 시마는 검지를 들어 앞을 가리켰다.
"전방주시. 핸들에서 손 떼지 말고."
"차갑다니까 시마짱."
이부키는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두근거린다느니,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이부키의 속마음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크리스마스의 당번 근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은 점이라곤 시마와 24시간 함께 있는 점 딱 하나. 하지만 그마저도 애초에 크리스마스를 그와 보낼 생각에 기대감으로 부풀어 데이트 일정을 충실히 짜고 식당과 호텔 예약까지 끝냈던 그에겐 너무한 처사였다. 원래 휴일이었던 12월 25일 근무가 당번으로 바뀐 만큼 그의 서운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에 두 사람 별일 없으면 당번 부탁해도 될까? 라는 대장의 말은 부탁의 형태였지만 사실상 통보였다. 아무래도 기혼자나 아이가 있는 사람들에게 휴일을 주는 게 맞지 않냐는 부언을 달았고 그 말은 일견 합당해 보이나 싱글은 언제까지고 공휴일에 휴무를 양보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기도 했다.
이부키는 항변하려 했으나 시마가 한발 앞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시마의 깔끔한 수락에 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부키를 쳐다봤다. 너는? 하고 묻는 눈빛에 이부키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에-하고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그는 서운함을 가득 담아 시마를 바라봤고 그의 연인은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로 업무에 돌아갔다.
어떻게 담담할 수 있을까? 시마는 자신과의 크리스마스가 전혀 기대되지 않은 걸까?
아침 9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당번 근무, 경찰도 밥은 먹지만 데이트코스의 정석인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순 없으니 예약 취소, 호텔에 묵을 수도 없으니 예약 취소,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분주소로 돌아가서 먹지 뭐, 하고 전날 미리 픽업. 계획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던 이부키는 시마와의 첫 크리스마스를 멋지게 보내기 위해 의외로 철저한 준비를 했었다. 다 소용없어 졌지만 말이다.
"이참에 확 밝혀버릴까?"
"무슨 말이야?"
"아니~ 우리가 싱글이라고 생각해서 휴일을 뺏긴 거잖아. 시마짱은 억울하지 않아? 그냥 다 밝히고-."
"절대 안 돼. 뒷감당은 누가 하라고? 조금은 생각을 하고 말을 해."
"흐음, 나는 별 상관없는데 말이지."
우리가 사귀는 걸 모두가 알게 되어도 말이야.
이따금 이부키의 말에는 무거운 중량이 실릴 때가 있다. 그 무게를 감지하고 나면 시마는 쉽게 입을 열기 힘들었다. 404호차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 사람은 고집스레 창밖을 내다봤고 한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운전에 집중했다.
경찰 사회는 고리타분하고 낡아빠졌다. 고작해야 기수 대장직에 여성 한 명을 임명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열린 사상을 가졌는지 자랑하려는 집단이다. 기수의 파트너끼리 정분이 났는데 둘 다 남자라더라, 알려지게 된다면 기수 밖으로 소문이 돌기도 전에 두 사람을 찢어 각자 다른 지역으로 날려버릴 게 자명했다. 시마는 그런 결말을 원치 않는다. 그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파트너는 모든 일이 좋은 방향으로 끝날 거라는 단단한 믿음을 품고 살지만, 이 세상은 그다지 다정하지 않아. 특히나 그들 같은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시마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파트너의 이름을 불렀다.
"왜?"
"만약 거기서 양보 못 한다고 말했으면 애인 생겼냐는 둥 물었을 텐데 속일 자신, 있어?"
"그야 없지."
"한 번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물어볼 거야. 사진 보여달라, 뭐하는 사람이냐, 어떻게 만났냐... 이부키는 절대 거짓말 못 했을걸."
"시마짱은 생각이 너무 많아. 순식간에 거기까지 상상했던 거야?"
"아니, 늘 생각하고 있었어."
늘, 이부키와 사귀기 시작한 시점부터 줄곧 생각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귀찮은 일이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일이 많아진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뜨겁게 사랑하기엔 그들 사이에 걸린 브레이크가 많았다. 시마에게 있어서 이부키를 사랑하게 된 건 막을 수 없는 일, 불가항력이었으나 그와 교제를 시작한 건 아주 커다란 각오와 결심히 필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결심을 내린 건, 욕심이 났기 때문이다. 그는 이부키 아이를 가지길 원했고 그와 오랫동안 함께 걷길 바랐다.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능한 오랫동안. 그걸 위한 안전장치를 몇 개나 설치하고서야 그는 이부키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안전제일주의 시마 카즈미를 그의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는 이부키가 온전히 이해하기는 꽤나 난이도가 높은 과제였다.
"가만 보면 시마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는 것 같아."
"나빠?"
"나빠. 냉정해. 계산적이야."
사랑은 좀 더 앞 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그런 거잖아? 투덜대는 말에 시마가 웃었다. 이부키라서 할 수 있는 말, 할 수 있는 행동. 아, 정말이지 그의 연인은 일말의 대책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러니 내가 더 깐깐하게 구는거야.
"그래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나만이 아니라는 거지?"
빨간 신호등에 끼익, 바퀴가 멈췄다. 이부키가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따스한 주황색 불빛이 이부키의 얼굴을 물들인다. 입가에 걸린 잔잔한 미소가 시마를 향한다. 시마는 귓바퀴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야생의 바보는 가끔씩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처럼 말을 한다. 그리고 마음이 통하는 상대라는 건 의외로 심장을 한껏 벅차오르게 했다. 시마는 헛기침을 하고 이부키의 시선을 피했다. 그 바람에 빨갛게 변한 귀 끝을 이부키에게 들킨 줄도 모르고.
"나 지금 큐릇해서 참을 수 없어져 버렸는데."
"큐릇하는 타이밍이 이상해."
"키스해도 돼?"
"안돼. 전방주시."
"깐깐해! 빨간 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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