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덷]조각글1

MARVEL 2025. 5. 5. 23:33

*더 쓸 일 없을 것 같아서 방생하는 조각글.... 울덷 싸우는게 보고싶었음.

 

 

 

발톱 세우고 사는 삶이 달가울리야 없다.

시도때도 없이 불시에 습격해오는 악몽들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땀에 흠뻑 절어 깨어나면 손등을 찢고 나온 아다만티움 칼날이 달빛을 반사해 번뜩였다. 몸에 잔류한 떨림을 간신히 잠재우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아직 이른 새벽이다. 잠에 든지 고작 2시간 지났는데 벌써 깨어나 무얼 어쩔 셈이냐 비웃는 시계초침 째깍이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린다.

로건은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 못드는 밤에 신물났다. 이런 밤이면 보통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산책 또는 술.

일반적으로 로건은 두 가지 모두를 택했다. 겉옷을 걸쳐입고 나와 목적없이 걷다가 적당히 후줄근한 술집을 발견하면 발을 들였다. 새벽공기 무르익은 시간에 술집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구면이라서 이미 자리잡고 있던 무리가 낯선 남자의 등장에 흥미를 가진다. 로건은 사람들의 관심이 제게 쏠리는 상황에 이골났고 자신이 원치 않게 여러 부류의 인간상을 끌어당기는 걸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싸움꾼.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우월한 수컷을 알아본 얼간이들이 제 여자 앞에서 어깨를 부풀리고 다가와 그에게 시비걸었다. 로건은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타입이다. 기껏해야 왈패밖에 되지 못한 이를 상대하기 위해 무기를 꺼내고 정체를 밝힐 필요도 없다. 햇병아리들을 가볍게 주물러주고 평온하게 잔을 기울이다보면 자존심에 치명상 입은 남자가 무리를 우르르 이끌고 돌아와 로건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그들 또한 뻔히 예상되는 결말을 맞는다. 이건 그에게 준비운동조차 되지 못하는 싸움이다.

용기있는 여성이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다. 저도 한잔 줄래요? 로건은 여자를 힐끗 보고 무심히 말한다. 난 말동무 필요 없어. 여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저도 말 많은 남자는 별로라. 어때요? 저는 그쪽을 더 깊이 알고 싶은데. 근육이 멋지게 자리잡은 허벅지를 은근히 더듬는 손짓이 노골적이다. 묘한 눈빛이 오간다. 그는 유혹을 마다하는 타입 또한 아니다.

그러나 오늘 밤은 그중 어떤 것도 내키지 않는다. 로건은 다만 냉장고에서 술을 하나 더 꺼내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다.

술은 약간의 도움을 주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진 못했다. 죽지 못하는 몸뚱이는 맘껏 취하지도 않았다. 깊은 잠에 빠져본 게 얼마나 됐더라. 가물가물하다. 웨이드 윌슨과의 마지막 싸움 이후로는 기억에 없다.

여자를 안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통제를 잃은 몸뚱이가 무자비하게 무기를 휘둘러 이름 모를 여자의 피를 묻히고 만 날부터 그짓도 관뒀다. 타인의 온기는 그를 안정시켜준다. 그러나 어느 누가 기꺼이 그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품을 내어줄까. 하루는 다정한 연인처럼 굴다가 다음 날엔 자신의 심장을 꿰뚫을지도 모르는 남자를.

로건을 술병을 기울였다. 도수 높은 알코올이 식도를 태우고 혈관을 홧홧하게 데웠다. 깊은 한숨은 나른함에 가깝다. 그는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묻었다. 뇌가 뭉그러진 편이 낫다. 남자의 삶은 전쟁통이나 다름없어 미치기 싫다면 술로 나를 적셔야 했다. 악몽과 목소리, 긴 세월 로건을 괴롭힌 것들은 그의 삶에 눌러붙어 쉬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지치고 피로한 남자는 이따금 신을 찾았다.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바라지도 않은 불사의 삶을 당신의 손으로 거둬가든가 아니면 이젠 날 좀 내버려 둬. 아직도 부족해? 난 충분히 괴로웠어. 한번쯤은 나도 가져봐도 되잖아. 여태 바라지 않은 삶을.

평범한 사람의 행복을.

단 한번도 제게 대답해주지 않는 신을 야멸차게 비웃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

 

그리고 로건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눈을 떴다.

잠에서 깬 남자는 자신이 느끼는 통증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몸 안쪽에서부터 비롯된 고통에 신음하며 통각이 시작되는 부위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차가운 금속이 살갗을 뚫고 갈비뼈 틈새를 비집었고, 피가 흘러 손바닥까지 척척했다. 그래, 적어도 망상병이 도진 건 아니군. 로건은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통에 박힌 칼날을 움켜쥐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이 덜 깬 희뿌연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그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달빛을 등지고 선 불청객을 노려봤다.

“좋은 아침이야 피넛. 나쁜 꿈이라도 꿨나봐?”

눈에 익은 윤곽과 귀에 익은 목소리, 낯설지 않은 체향이 로건의 감각을 꺠웠다. 서서히 어둠에 적응된 눈이 침입자를 알아봤다―염병할 웨이드 윌슨!

“웨이드, 씨발 이게 무슨 짓이야!”

“정신이 번쩍 들지?”

그렇게 말하며 웨이드는 로건의 몸에 꽂힌 칼을 느리게 비틀었다. 피비린내가 훅 올라왔다. 내장에서 차오른 피가 목 안쪽에서 끓었다. 로건은 핏물을 삼키며 턱을 악물었다. 도대체 왜 이러냐고 묻고 싶었다. 믿을 수 없어서, 그가 자신을 공격할 이유가 없어서, 직전까지 그에게 평온함이 무엇인지 알려준 자가 이런 짓을 벌인 연유를 알아야 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경계가 풀어지고 느슨해지는 날만을 기다렸을까? 누구의 사주를 받고 벌인 짓일까. 이정도 공격에 자신이 죽지 않을 걸 알면서 멍청한 짓을 하고만 이유는 무엇인지.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로건은 확인해야 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남자가 뒤집어쓴 마스크를 확 벗겨냈다. 눈앞의 것이 환각인지 아닌지 알아내고자, 그리고 웨이드가 자신이 아는 진짜 ‘웨이드’인지 확인하고자. 그가 사는 세상에는 괴이한 능력을 지닌 초인들이 많은데 그 중에 정신지배로 타인을 조종하거나 남의 얼굴을 베껴내는 놈들이 너무 많아 손으로 셀 수도 없다……

그리고, 웃음기나 농담 없이 차분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보는 웨이드 윌슨이, 진정 그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로건은 그가 자신의 웨이드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 내 삶이 이리 평탄하게 흘러갈 리 없지. 평범한 행복은 과분한 소망이다.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믿었을까. 분노가 치밀었다. 언젠가 제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 자란 걸 알면서도 그를 신뢰하기로 결정한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고 제 신뢰를 저버린 변덕스런 애새끼를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 그는 웨이드 윌슨을 거칠게 발로 걷어찼다. 악! 벽에 등을 세게 부딪히며 바닥으로 쓰러진 녀석은 제 발로 서기도 전에 로건에게 목을 붙잡혀 허공에 들렸다. 용병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손아귀 힘에 숨이 막히는지 발버둥치며 손톱을 세우고 로건의 손등을 마구 긁어댔지만 아다만티움으로 이루어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제 옆구리에 틀어박힌 카타나를 뽑아내 바닥으로 던졌다. 녀석을 벽에 밀어붙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킨 다음 클로를 빼들어 녀석의 몸속을 난폭하게 쑤셨다. 으극, 웨이드의 입에서도 울컥 피가 솟았다. 입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한 비명이 로건의 손 안에서 웅웅 울렸다. 그는 움찔움찔 떠는 남자에게 바싹 몸을 붙이고 낮게 그르렁댔다.

“내가 그간 네게 너무 관대했던 모양이군. 난 습격당하는 걸 즐기지 않아. 나랑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면 얼마든지 쑤셔줄 테니까 말만 하라고, 친구.”

“컥, 이것, 좀, 쿨럭, 난 그냥 널…크헉, 널 깨우려 한건데.”

목졸린 신음 사이로 변명이랍시고 떠벌리는 말에 로건이 코웃음쳤다. 변명이 성의없어. 죽음 직전의 순간에도 유려하게 굴러가던 혓바닥은 어디로 갔지? 울버린의 악력은 성인 남성의 목뼈를 얇은 나뭇가지처럼 뚝 부러뜨리고도 남는다. 그러니 목을 부러뜨리긴커녕 숨통을 조이는 데에 그쳤다는 건 로건이 아직 남자를 많이 봐주고 있단 의미다. 이 버르장머리없는 꼬맹이가 알아차리기나 할까.

“정중하게 깨우는 방법은 모르나봐?”

위협적으로 속삭이며 손에 서서히 힘을 더했다. 순간 웨이드가 그의 손목을 절박한 손길로 텁, 붙잡았다.

“정, 끕, 정중하게 했어. 그랬, 더니 니가, 날 찔렀잖아.”

“뭐?”

“니가 내 어깨에 구멍냈다고, 이 머저리야!”

그제야 로건은 웨이드의 팔꿈치에 고였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핏방울을 발견했다. 그의 왼쪽 어깨를 감싼 수트 위에 날카롭게 찢긴 세 가닥 발톱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모를 수 없는 상처자국―자신의 흔적이다. 그는 당황하며 웨이드를 억누르던 손을 놨다. 녀석은 바닥에 주저앉아 목을 감싸쥐고 콜록, 밭은 기침을 내뱉었다.

“아 좆같네. 나 이거 손해보상 청구할거야. 앞으로 한 달동안 메리 똥은 니가 치워. 존나 아파 씨발.”

사포에 긁힌 듯 까끌한 목소리였다. 로건은 마른세수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연신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던 그는 마침내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같은 몸뚱이가 기어이 사고쳤구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의지와 상관없이 휘둘렀지만 자신이 저지른 짓이다. 로건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게 될까 두려웠다. 침묵과 고요 속 비명소리는 결코 그를 떠나지 않았으니. 

로건은 피를 쏟으며 끙끙 앓는 웨이드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결국 곁에 둔 사람을 다치게 만들었다. 이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저떄문에 상처받는 경험은 한번이면 족했다. 이 꼬라지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스스로 통제하기 힘든 순간에 타인이 제 곁으로 다가오게 두지 않으려했다. 그래서 매일 밤 자신을 방 안에 가뒀다. 밤은 그가 가장 취약해지는 시간이었으므로.

분명히 문을 잠갔을텐데.

“방엔 어떻게, 왜 들어왔어.”

신음을 삼키던 웨이드는 자신을 추궁하듯 따지는 로건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올려보며 답지 않게 말을 잃었고, 이내 날선 웃음소리를 냈다.

“…와, 지금 그걸 따지는 거야? 울버린 사전에 ‘미안해’는 없나 봐? 왜긴, 열일하고 귀가했는데 니 방에서 끔찍하게 앓는 소리가 들리잖아. 난 아픈 사람 외면하는 싸이코패스가 아니고, 마침 여긴 내 집이고, 와 세상에! 마스터키가 나에게 있네? 그래서 문 좀 땄어. 정말 진심으로 죄송하네요.”

“비꼬지마. 내가 문을 잠갔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란 생각은 안 들든?”

“뭐, 200년 묵은 오소리는 딸칠 때 뭘 떠올리는지 궁금하기야 했지.”

“웨이드!”

“소리지르지 마! 난 널 걱정했다고!”

씨근대는 숨소리가 잦아들고 정적이 찾아왔다. 웨이드는 화가 잔뜩 나서 바닥만 꼬나보고 로건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침묵이 거북했다. 보통의 경우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웨이드였다…그러나 지금만큼은 반대였다…로건은 제 평생의 친구로 여겼던 적막과 고요를 견디기 어려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걱정, 걱정이라. 문득 명치 부근이 꽉 죄어들었다. 먼 과거에 그에게도 있었다. 자신을 걱정하고 사랑해주는 친구들, 가족같은 엑스맨들. 순간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귀에 이명이 울렸다. 걱정, 그래. 너희들은  늘 나를 걱정한다고 말했다.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하지만 봐.

그랬던 너희들은 지금 어디에 묻혀있지?

서투른 호의의 댓가를 호되게 치른 웨이드는 입을 꾹 다문 태세를 고수했다. 어설프게 남을 위해 나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는 비틀비틀 일어서서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를 낚아채 머리 위로 푹 눌러썼다. 로건을 짧게 노려보고 방을 나서려는 그를 향해 늙은 남자가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걱정해달라고 한 적 없어.”

“야, 그냥 ‘미안해’나 ‘고마워’하면 안돼? 꼭 어렵게 가야겠어?”

“아하. 이젠 날 가르치려 드는군.”

인정한다. 로건은 지금 고집부리고 있다. 실수 전문가인 웨이드 윌슨조차 쉽게 정답을 말할 정도로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정답을 말하지 못한다. 자신이 이다지도 위태로운 존재란 걸 인정한다는 건 즉, 자신을 받아준 친구들…가족들이 예외없이 끔찍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냉정한 현실마저 인정해야 하니까.

한 마디로.

자신이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는 인간이란 걸 끝끝내 받아들여야 해서.

“쉽게 말해줄까? 나가.”

그래서 그는 최악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 많은 선택지 중에 로건은 회피를 골랐다. 그건 임시방편이지만 꽤나 잘 먹히는 수단이다. 이제까지는 그래왔다. 그는 모두에게서 등을 돌렸지만 모두가 그를 기다렸다. 돌아올 것을 알기에 그가 준비될 때까지 시간을 줬다. 그들의 용서와 자비는 그가 돌아갈 자리를 마련해줬다.

“뭐라했냐?”

“당장.”

“여긴 내 집이고, 넌 내게 그럴 말할 자격 없어!” 웨이드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로건은 굽히는 방법을 모르는 남자다.

“좋아, 내가 나가지.”

그러나 그가 간과한 한 가지―그가 상대하는 자는 데드풀이다. 인내심이라곤 털자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살인 용병. 과연 그에게 용서나 자비를 배울 기회가 주어지기나 했을까?

그러니까, 로건은 그가 총을 꺼내든 줄도 몰랐다가 뇌진탕이 온 것처럼 시야가 울렁거리고나서야 웨이드 윌슨이 그의 미간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총알은 그의 두개골을 꿰뚫지 못하고 이마 정중앙에 박히는 데에 그쳤지만 웨이드는 아랑곳않고 이번에는 그의 명치와 옆구리, 무릎 위를 향해 총을 쐈다. 정확하게 급소였다. 로건은 근거리에서 발사된 총알이 제 몸 깊숙이 박히는 걸 느꼈다.

뇌가 뒤집힐 듯한 분노가 이성을 압도했다. 그는 욕설과 함께 몸을 날려 웨이드를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얌전히 과녁이 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어느새 치켜세운 클로로 머리통을 쑤시기 위해 내지르나 용병은 날래게 몸을 굴려 공격을 피해간다. 보통 사람은 똑바로 잡고 서기도 어려운 묵직한 총을 어린애들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가볍게 다룬다. 총알이 허공을 가르고 칼날과 칼날이 맞붙은 싸움 끝에 방안은 난장판이 된다. 두 남자는 한치의 물러남 없이 서로를 난도질한다. 허공을 가르는 총알에 전등이 파삭, 깨지고 헛손질에 벽지가 갈라지고 드러난 콘크리트 벽에 피가 튄다. 부웅, 자신을 향해 휘둘러 날아온 의자를 피하기 위해 웨이드가 몸을 숙이자 와장창 소리내며 창문이 깨진다. 곧 바깥으로 날아간 의자가 무언가에 부딪혀 박살나는 소리와 더불어 자동차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린다. 숙였던 몸을 일으키는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로건이 웨이드의 가슴팍에 세 개의 칼날을 단단히 박아넣는다. 괴롭게 헐떡이는 소리를 배경삼아 로건은 용병의 몸을 마구잡이로 베었다. 살점이 튀고 피가 흩뿌려지는 살육 속에서 웨이드는 정신을 잃기는 커녕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손을 옆으로 뻗어 협탁 위 텅 빈 위스키의 병목을 잡았고, 눈앞의 두개골을 향해 망설임없이 병을 내리쳤다. 

“이런 거로는 날 못 죽여” 로건이 가볍게 목을 돌리며 빈정댔다.

“그럴까?”

웨이드가 비열하게 웃더니 톱날처럼 깨진 병 아랫부분으로 로건의 목덜미를 찔렀다. 들쭉날쭉한 첨단이 피부를 찢고 목의 혈관을 터트렸다.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남자를 밀어낸 웨이드는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침대 위에 등으로 떨어졌지만, 매트리스 반동을 이용해 곧바로 몸을 날리면서 유연하게 다리를 휘둘렀다. 덩치에 비해 놀랍도록 가볍고 날랜 몸짓이었다. 만약 로건의 골조직이 평범한 사람과 같았다면 턱뼈가 부숴졌을 것이다.

그러나 로건은 자신의 턱을 가격한 발차기에 잠깐 표정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는게 다였으며, 곧바로 복사뼈 부근을 잡아채서 그를 방안의 모서리진 데로 던져버렸다. 으으윽,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흘렀다. 목에 박힌 유리병을 단숨에 뽑아낸 로건은 힐링팩터가 상처가 아물게 하도록 내버려두고 맥을 못 추어 빌빌대는 웨이드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를 번쩍 들어올려 침대로 집어던졌다. 노련한 용병은 곧바로 몸을 일으킨 뒤 종아리에 수납된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내 덮쳐오는 남자에게 몸이 짓눌리고 날카로운 꼬챙이에 손바닥을 꿰뚫려 매트리스 위에 고정되었다. 압도적인 힘 차이 앞에선 최고의 용병이란 찬사도 무력했다. “아악, 씨발! 개같은 포세이돈!”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위에 올라탄 남자가 그를 거의 납작해지도록 찍어눌렀다. 로건은 제 얼굴을 향해 발작적으로 주먹질하는 웨이드의 반대쪽 손을 강압적으로 떼어내고 시트 위에 내리누른 뒤 손바닥 안쪽에 클로를 깊게 꽂아넣었다. 웨이드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펄떡이자 터져나간 베개에서 뿜어진 깃털이 나풀댄다. 손등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을 짓이긴 후에야 클로를 거둔 로건이 고양감에 취해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띠었다. 힘줄과 신경을 모조리 끊어놨으니 녀석의 힐링팩터가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이후 몇 분간은 주먹쥐기조차 어려울 거다. 그는 자신이 제압한 사냥감을 여유롭게 내려봤다.

“예쁜이, 더 아프기 싫으면 착하게 굴어.”

“좆까, 헉, 넌, 씨발, 전 우주 통틀어 가장 끔찍한, 울버린이야.” 웨이드가 간헐적으로 헐떡이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 말에 로건은 폭소를 참지 못했다. 미친 사람처럼 숨이 넘어가라 웃다가 한순간 뚝, 웃음을 그쳤다.

“나도 알아.”

그리고 웨이드는 자신을 내려보는 어두운 눈동자와 담담한 목소리에 짙게 묻은 슬픔을 느꼈다. 그건 아주 찰나라서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봤을지도 모른다……

웨이드는 자신이 느낀 것에 의아함을 제기하기도 전에 제 얼굴 위로 크게 그림자 지는 로건의 주먹을 마지막 기억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진짜로 버리기 아까운 이유로 방생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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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삶의 가장 큰 단점은 아침에 치우지 못한 커피잔이 저녁에 귀가했을 때 그 자리 그대로 있다는 점이다. 어두운 거실 불을 밝혔을 때 자신을 기다리는 현실이 말라붙은 커피자국일 때 웨이드 윌슨은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반겨주는 사람 없고 기다려야 할 사람 없는 철저한 외톨이는 싫다. 바네사나 알,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살았던 경험은 그를 더욱 외로움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그는 혼자 남겨진 삶에 자신없다.

울버린은 하우스메이트로서 꽤 훌륭했다. 가끔 웨이드는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컨디션으로 집에 돌아왔고, 뱀이 허물 벗듯 수트에서 몸만 쏙 빼내서 침대에 퐁당 빠져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눈을 뜨면 옷가지가 세탁물 바구니에 들어있거나 옷걸이에 곱게 걸려있는 걸 발견하곤 했다. 데드풀 수트가 드디어 자유의지를 갖고 걸어다니기 시작한 게 아닌 이상 누구의 노력이 들었는지 모를 수 없다. 그래서 웨이드 역시 때로 로건이 만든 아수라장을 대신 처리하며, 말하자면, 꽤 괜찮은 룸메이트 역할을 수행했다. 그건 상당히 좋은 경험이었다. 웨이드는 그들이 서로를 돌봐준다고 생각했다.

착각도 유분수지.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에 로건의 방에서 혼자 덩그러니 눈을 뜬 웨이드가 눈앞에 펼쳐진 외면하고픈 풍경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도로 눈을 감았을 때 그는 마침내 로건이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개판이 된 방에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은 그를 아프게 만들었다.

차이점은 명확하다. 로건은 잠시 머무를 곳이 필요했고, 함께 살 사람이 필요한 쪽은 자신이었다. 방 한 칸을 내어주며 으스댔지만 그가 거절하고 뒤돌아 떠날까봐 내심 조바심 냈다. 멍청한 웨이드 윌슨. 로건이 진짜로 너랑 살고 싶어서 여기 남았겠어? 넌 그냥 마침 거기에 있어서, 편리해서, 쉽게 뭐든 다 내주는 사람이라서 선택받은 거야. 주제도 모르고 규칙을 어기다니. 그의 영역을 침범한 대가를 치룬 거다. 버림받는 건 익숙하다.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잖아. 그저 다시 시작될 뿐이다. 말라붙은 커피자국과 동거하는 삶.

씨발.

근데 이게 내 잘못인가?

웨이드 윌슨은 억울했다. 일반적으로 “넌 진짜 미친새끼야.” 라거나 “널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는 말은 듣는 쪽은 그였는데 어제는 드물게 역할이 반전되었다. 개자식이 지만 정신병 있는 줄 알아. 감히 날 정신병으로 이기려 들어? 그러나 억울함을 쏟아부을 대상은 영영 사라졌고 발 디딜 틈없이 어지럽혀진 방은 정리가 필요하다. 그는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갈거면 지가 벌여놓은 난장판이나 해결하고 가든가. 하여간에 끝까지 재수없는 새끼. 고고한 척은 혼자 다해요. 웨이드는 유리조각을 밟지 않으려 발끝을 세우고 살포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깨진 창문으로 들어온 찬바람 때문에 방안이 휑하다. 아 창문. 수리비 내고 가라고 할 걸. 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디든 심각하지 않겠냐만은 무엇보다도 피가 말라붙은 벽 청소가 시급하다. 벽지로 새로 발라야한다. 도배업자를 부르면 살인사건이 벌어진 줄 알고 까무라칠거다. 이런 얼굴을 한 남자가 연쇄살인마인 건 너무 개연성 있잖아. 웨이드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좋아, 도핀더를 불러야겠어. 히어로 지망생인 녀석에게 알려주는 거야. 네가 히어로가 되는 건 무리지만 내 사이드킥부터 시작하는 건 나쁘지 않은 시도야. 사이드킥의 기본 소양을 지금부터 알려주지. 그건 바로 도배 능력이야……그리고 히어로와의 동거가 일반적이거든. 나랑 같이 사는 거 어때? 뭐? 로건? 그 씨발놈은 뭐하러 찾아. 대단하신 울버린이잖아. 모두가 선망하고 따르는 히어로 중의 히어로. 누가 그를 거부하겠어. 나같은 거랑은 근본부터 다른 영웅이신데 뭘. 또 어느 집에 쳐박혀서 술이나 쳐마시겠지. 남의 술 창고나 털면서 말이야. 오, 썅. 나한테 청구서 날아오면 안되는데? 확실히 해둬야겠어. 데드풀과 울버린은 결별했으니 나한테서 그 새끼 찾지 마세요……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간 웨이드는 자신이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너 뭐해?”

그들의 동거 계약은 아직 유효한걸까? 놀랍게도 로건이 거실에 있었다. 등을 보이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물건은 한 군데에 둬. 배변패드는 또 언제 위치를 바꾼거야? 집을 다 뒤져도 찾을 수가 없잖아. 젠장.”

“그건 왜?” 웨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뒤통수에서 답을 찾고자 웨이드는 골똘히 머리를 굴리다가 별안간 깨달았다.

아 설마.

한 달동안 메리 똥 치우라고 한 것 때문에?

웨이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울버린이, 미안하다곤 죽어도 말 못하는 꼬장꼬장 늙다리 뮤턴트 엑스맨이 내가 농담처럼 흘린 말을 기억하고 개똥을 치운단 거?

깜찍아…

너 이름값 좀 하네? 이거 화해의 손내밀기라고 봐도 돼?

단지 그가 떠나지 않았단 걸 확인했을 뿐인데 마음 속 응어리가 반절은 녹아내렸던 웨이드는 남은 반절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등신이 따로 없지? 나도 알아. 멍청하고 물러터져서 이용해먹기 딱 좋은 호구새끼. 비웃을만 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는…그는 정말로 혼자가 싫었다….

“배변패드. 다 떨어져서 사야 돼.”

“아 씹. 그런 건 빨리 말해.”

“같이 사러 나갈래? 장도 봐야 돼.”

“그래. 참, 아침 만들어놨어. 니가 쳐자느라 벌써 점심이지만 아무튼. 먹든가 버리든가 니 맘대로 해.”

과연 식탁에 올려진 접시 위에 싸늘하게 식은 팬케이크의…시체? 가 있다. 웨이드는 접시와 포크를 들고 소파로 이동해서 풀썩 앉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난 이걸 굽는 냄새를 좋아하는데, 킁킁, 이거 팬케이크 맞아?”

“야, 먹지마. 내놔.”

울컥한 로건이 접시를 빼앗기 위해 손을 뻗자 웨이드는 잽싸게 접시를 몸 뒤로 숨겼다.

“울비가 날 위해 만든 걸 버린 순 없어! 다 먹을게. 약속.”

웨이드는 행복한 표정으로 작게 콧노래까지 불렀다. 큼지막하게 자른 팬케이크 한 조각을 입안에 한가득 욱여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한참 걸려서 목구멍 아래로 삼킨 다음 그는 빙긋 웃고 슬그머니 엉덩이를 뗐다.

……메이플시럽을 어디다 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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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덷]있을 법한 일

2025. 4. 20.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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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덷] 있을 수 없는 일

2025. 4. 20.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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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소재

※울버린과 데드풀(딱히 사귀진 않지만 쓴 사람이 울덷 고정이라서 원산지 표기같은 겁니다)

 

 

 

 

아마도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 중에 나온 말이었을 거다. 웨이드 윌슨과의 대화란 게 대체로 그런 식으로 시작되는지라 맥락이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만 바보가 된다. 격전 후 너덜너덜해진 하객용 소파에 몸을 풀썩 내던지고 검지손가락을 방아쇠울에 걸어 장난감 다루듯 휙휙 돌리던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그때 로건은 총과 칼과 폭발이 난무하는 싸움장이 된 결혼식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웰컴 드링크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가 도수는 거의 제로에 가깝고 지독히 달기만 한 음료수를 즉시 뱉어냈다. 이딴 것도 술로 치냐? 마구 구겨진 로건의 얼굴을 보며 웨이드는 즐겁게 웃었다. 그게 요즘 유행이래 오소리야. 아그극. 웨이드의 온몸이 기묘한 각도로 뒤틀렸다.힐링팩터는 피로 얼룩진 용병의 부서진 몸 이곳저곳을 난폭하게 수리했다. 뼈가 붙고 살이 차오르며 몸속에서 칵테일처럼 뒤섞인 장기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고통이 마침내 잦아들자 웨이드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하튼. 결혼식은 축의금을 두둑하게 챙기기라도 하지, 장례식에 돈을 많이 들여봤자 상조회사 배불려주는 꼴만 더 돼?”

“젠장, 고작 이게 다라고.” 케이터링 테이블을 샅샅이 뒤져 포도주를 겨우 찾아낸 로건이 중얼거렸다.

“난 아직 한 번도 결혼이나 장례를 겪어본 적 없지만, 사람들 말로 결혼식에 온 사람보다 장례식에 와준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대. 어떻게 생각해 로건? 진짜야?”

“이 핑거푸드는 나쁘지 않네.”

“만약 그렇다면 나도 내 장례식에 와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어줘야 하니까, 같이 고민 좀 해주라 울버린아. 나만 할 수 있는 스페셜한 이벤트라면 역시…3일 만에 부활하기는 어떨까?”

“지루한데.”

“동의해. 창의적이지 못했어, 월드 베스트셀러를 모방했거든, 잠깐만, 너 내 말 듣고 있었어?”

 

웨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스크 바깥으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표정 변화에 로건이 피식 웃었다. 그는 코르크 마개를 이로 물어 가볍게 뽑은 다음 소파 하나를 전부 차지한 용병의 다리를 툭툭 쳤다.

 

“치워봐. 같이 앉자.”

 

로건은 소파 한구석에 편히 몸을 기대고 떫은 와인으로 입안에 감도는 인공적인 단맛을 씻어내렸다. 와인을 싸구려 맥주처럼 들이켜는 남자에게선 교양이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지만, 오히려 야성미가 더해져서 인정, 더럽게 섹시하긴 하네, 웨이드가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왜 다들 울버린의 유전자를 가지지 못해 안달인지 납득할 정도야.

 

남자는 저를 희롱하는 말을 무심히 넘겼다. 그리고 턱밑으로 흐른 와인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내고 말했다.

 

“네가 가본 곳을 참고하면?”

 

웨이드가 투덜거렸다. “그게 문제야. 솔직히 말해 나는 이때까지 ‘내가 죽일 사람의’ 결혼식과 ‘내가 죽인 사람의’ 장례식 말곤 가본 적이 없어서 보통의 경우 뭘 하는지 모르겠다고. 너도 예상하겠지만 내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혼비백산, 장내는 아수라장, 대혼돈의 멀티버스거든! 격식 차리는 머저리들이 허둥대는 꼬락서니가 되게 재밌어. 내 특기 중에 하나야. 기념일 망치기.”

 

“친구들 결혼식엔 가봤을 거잖아.”

 

그 말에 웨이드는 신랄하게 웃었다. 하!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 중 하나 골라봐. 빨간 마스크를 쓴 미치광이가 결혼식에 나타나는 것과 뭉개진 페퍼로니 피자같은 웨이드 윌슨이 결혼식에 나타나는 것, 뭐가 덜 끔찍해?”

“난 둘 다 괜찮아.” 로건이 어깨를 으쓱였다.

푸우우, 웨이드는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너야 나한테 홀딱 반했으니까. 내 말은, 아무도 날 반기지 않을 거야. 누가 좋아하겠어. 살인하기 위해 결혼식장에 등장하는 암살자든 할로윈 악몽에나 나올 법한 괴물 얼굴을 한 자식이든.”

“너 그렇게까지 끔찍하지도 않다니깐.” 

“슬슬 궁금하네. 네 콩깍지 도대체 언제쯤 떨어져? 우리가 함께한 지가 보자…얼마나 됐지, 몇 년이더라.” 웨이드 윌슨은 기억을 더듬는 표정으로 허공을 보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다가 빠르게 포기하고 말했다. “...그 세월 동안 매일 내 얼굴을 보면 미칠 만도 해.”

“친구, 난 거짓말 안 해. 미치지도 않았고.”

“워우. 제정신으로 이런 말 하는 게 더 무서워.”

 

로건은 가만히 웨이드를 쳐다봤다. 노려보는 것에 가까웠다. 녀석은 때로 그를 무척이나 열받게 했는데 거기엔 짙은 자기혐오 성향이 연관되어서 로건은 녀석을 더 질책하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지 못하는 괴물이 되었고―적어도―이 세상에서 녀석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유일하다. 게다가 막 ‘변화’가 생겼을 때 그와 마주친 사람들의 반응이 저 유쾌한 용병의 영혼에 깊은 두려움을 새긴 게 분명하다. 웨이드는 늘 명랑한 말투와 가벼운 단어 선택으로 말의 무게를 속였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의 무게까지 속이진 못했다….

 

결국 로건은 나지막이 한숨 내쉬는 데에 그쳤다. 넌 네 친구에게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해. 서투르게 위로하는 로건을 바라보며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던 웨이드가 오 아냐! 하며 그의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아냐. 걔네는 날 초대했는데 내가 안 갔어. 날 변호하자면, 너는 그런 적 없어? 내가 걔네 인생에서 빠져주는 게 더 낫다고 느낄 때 말이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로건은 말을 아꼈다.

왜 모르겠어. 난 지금도 느껴, 웨이드 윌슨. 아주 뼈저리게. 로건은 쓰게 웃으며 와인을 비웠다.

 

“…좋아! 결정했어. 나만이 할 수 있는 스페셜한 이벤트.” 웨이드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마스크 위로 히죽대는 미소가 떠올랐다. 

“말해봐.”

“바로바로…” 실컷 뜸 들이다가 한다는 말이, “…조용한 장례식! 어때, 누가 예상하겠어, 그 데드풀의 장례식이 울음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게 치러질 거라고.”

“되겠냐?” 로건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웨이드 윌슨만큼 소란스러운 그의 친구들의 면면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시끄럽고 경박한 장례식이 될걸.”

“아니, 그럴 리 없어. 왜냐면, 아무도 부르지 않을 거니까! 악단도, 댄서도 없어. 아무도.”

 

NOBODY. 웨이드가 웃으며 덧붙였다. “내 장례식에는 절대, 절대로 사람들 초대하지 마. 아니 그냥 장례식을 하지 마. 나 알지? 사람들이 슬퍼하고 우는 순간에 아무 농담도 건넬 수 없는 거야말로 내게 닥친 가장 커다란 비극이란 거. 광대의 숙명이랄까. 너도. 날 위해 울지마. 네 눈물은 더 의미 있는 사람을 위해 흘려.”

 

답지 않게 진지하네. 로건은 그의 파트너가 드물게 진지한 순간에 나누는 대화 주제가 왜 이따윈지 따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게 의미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버렸어. 남은 건 너 하나뿐이었다고.

 

그러나 로건은 혀끝에 머물던 말을 삼켰다. 그건 녀석에게 부담을 줄 뿐이라.

 

“네 뜻은 잘 알겠어. 수다는 그만. 이제 집에 가야지.”

 

그는 푹신한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웨이드를 붙잡아 일으켰다. 웨이드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몸을 받아들어 위로 끌어당겼다.

 

“으으, 싫은데.”

“더 늦으면 우리 둘 다 못 돌아가.” 입술을 삐죽이는 그를 향해 로건이 재차 단호하게 일렀다.

“나도 알아. 그냥 좀. 이대로 가기 아쉬워서.”

 

읏쌰, 유연하게 몸을 튕겨 똑바로 선 웨이드가 먼저 걸어갔다. 다소 빠른 걸음이었다. 로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따라갔다. 야. 천천히 가. 그는 용병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먼저 가지 마 웨이드.

 

웨이드.

 

그러나 남자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병은 앞서갔다. 입안이 말랐다. 손을 뻗어봐도 막을 수가 없다. 몇백 년의 세월도 저것 앞에선 무력하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돌연 웨이드가 그를 돌아봤다. 퍽 발랄한 투로 입을 열었다.

 

 

“이봐 로건. 내가 그리워?”

 

 

죽은 사람을 이쪽에 붙잡아두는 건.

그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로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움이라, 굉장히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참회, 비탄이야말로 그에게 걸맞은 단어가 아닐까. 죄책감을 빌미로 책임회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는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이려 했다. 웨이드의 죽음에 걸린 자신의 책임.

 

그러나 웨이드는 그가 자학하며 술통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심지어 죽어서도 그 녀석은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빼내려 대뜸 찾아오곤 했다. 새로운 악몽이 그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정신을 쏙 빼놓는 수다를 이어갔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애쓴다, 염병.

 

하지만 그 노력 때문이라도 로건은 살아야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웨이드가 낄낄거렸다.“앙큼하긴. 깜찍아, 너 거짓말에 소질 없어.”

 

맞아. 우리 중에 빌어먹을 거짓말쟁이는 너잖아. 로건이 잔잔하게 웃으며 수긍했다.

그래서 묻는 건데 말이다.

 

“하나만 확실하게 해. 너 진짜로 죽은 건 맞아?”

 

 

말없이 짓궂은 미소를 씩 지은 웨이드가 그를 향해 손키스를 날렸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지, 자기야.

“꿈에서도 보고 싶어야 할 정도로 날 사랑하는지 몰랐어. 종종 놀러 올게.”

 

 

* * *

 

 

데드풀과 울버린.

두 사람은 죽지 못하는 저주로 엮여 있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웨이드 윌슨이 저주를 풀고 혼자 도망갔다. 제기랄.

남의 인생에 멋대로 끼어들고 끌어들여 놓고 떠날 때까지 제멋대로다.

마지막까지 같잖고, 철딱서니없고, 나사 빠진 등신새끼.

듣고 있냐 머저리야. 내 말에 반박하고 싶거나 한판 붙고 싶다면,

내 옆에 돌아와서 해. 난 시간이 아주 많거든. 넘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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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소재

*적폐

*엔드게임에서 에테르를 가져가기 위해 아스가르드로 타임트립한 토르가 로키의 감옥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면? 그리고 에테르를 빼앗긴 채로 시간선이 흘러서 영영 에테르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면? 

 

 

 

 

 

이례적인 일이 연달아 벌어졌다. 

 

바이프로스트 아래로 추락하여 죽은 줄 알았던 둘째 왕자가 미드가르드를 침략한 악당이 되어 죄수의 신분으로 잡혀왔고 왕위를 계승해야 할 후계자는 에테르를 몸에 지닌 미드가르드 여자를 아스가르드에 데려왔다. 첫째 왕자님이 지구인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건 알았지만 아스가르드로 데려올 줄이야. 설마 결혼이라도 할 셈일까? 100년도 살지 못하는 필멸자와! 아스가르드 신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느 에시르 신도 필멸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5000년을 사는 신족에 비하여 미드가르드 인의 생명은 뺨에 스치는 바람보다 빠르게 사그라든다. 에테르에 침식당한 인간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무한한 파괴력을 가진 에테르는 그것을 담은 숙주마저 파괴하기 위하여 그녀의 생명력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단 한 번도 탈옥이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아스가르드 지하감옥에서 폭동이 벌어졌다. 전쟁 포로에 섞여 들어온 하나의 다크엘프가 커스(Kurse)로 변하여 경비병을 살해하고 죄수를 풀어준 대참사였다. 아스가르드의 병사들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지하감옥으로 내려갔다. 수가 많다고는 하나 패잔병의 무리였다. 그들은 아스가르드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묠니르를 붕붕 휘두르며 토르가 개입하자 일은 더 쉬워졌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뛰어난 문지기의 눈을 속인 다크엘프의 함선이 아스가르드를 침입했다. 그들의 함선을 저지하기 위한 대공포와 비행선이 부서지고 굳건한 방어벽은 파괴되었다. 그 과정에서 다크엘프의 함선이 박살나기도 했으나 그들은 무기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것 같았다. 한 때 우주를 암흑 속에 빠트릴 뻔했던 막강한 무기, 에테르는 함선 십 수개와 동족을 희생할 가치가 있었다. 말레키스는 아스가르드의 찬란한 황금빛 궁전을 불바다로 만들며 들어섰다. 그리고 에테르를 찾기 위해 발을 돌리는 순간......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먼 옛날, 보르왕 재위시절 에시르들과 전쟁을 벌였던 때처럼, 에테르는 바로 손에 닿는 곳에 있었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가 바라던 무기는 더 이상 아스가르드에 없었다. 아니, 아스가르드 뿐만 아니라 그가 존재하는 우주 어디서도 에테르의 기운을 감지할 수 없었다. 다크엘프를 깨운 힘이 전 우주에서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왜, 상식적으로 절대 일어날 리 없는 일들이 있지 않은가. 서리거인과 에시르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진실된 우정을 나눈다거나, 발할라에 든 전사가 다시 육체를 얻어 되살아난다거나, '그게 말이 돼?' 라고 되물을 법한 일들. 토르는 텅 빈 손을 쥐었다 펴며 생각햇다. 상상만으로 끝나야할 일들이 오늘 너무나 많이 일어났다. 멸족한 줄 알았던 다크엘프가 살아있었고 지하감옥의 경비가 뚫렸으며 아스가르드의 방벽이 무너졌다. 이 사건은 역사에 뭐라 기록될까? 아스가르드의 고도로 발전된 기술로도 파괴하거나 분리할 수 없었던 에테르가 제인의 몸을 빠져나와 완전히 사라진 이 일은?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일을 후대에 어찌 남기면 좋단 말인가. 심지어 이 날의 황당무계한 사건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토르는 허공으로 팔을 쭉 뻗었다. 그는 묵직하게 바람을 가르고 날아와 그의 손에 안정적으로 잡히는 거친 손잡이의 감촉과 망치의 무게를 상상했다. 그가 손을 내밀면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언제나 그에게 돌아와주던, 자신의 분신같은 무기. 그러나 이젠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신의 무기, 묠니르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묠니르가 사라졌다는 토르의 말에 오딘은 부서진 궁의 재건을 지휘하다말고 영면에 들 뻔했다. 숨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가 졸지에 아버지를 발할라에 보낼 뻔한 토르는 불같이 화내는 올 파더를 피해 제인을 지구에 돌려보낸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바이프로스트를 탔다.

 

 

 그리고 약 한 달이 자났다. 아스가르드로 돌아온 토르는 황금이 깔린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발걸음에서 조급함이 묻어났다. 올 파더 오딘이 슬립에 빠졌다. 이번엔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치료사의 선고를 전해 들은 토르는 지구에서의 히어로 노릇을 관두고 서둘러 아스가르드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지?" 토르는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로키를 떠올렸다. 이제 그는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로키를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동생의 화려한 업적을 고려하면 합리적 의심이었다. 그 아이는 몇년 전 아버지와 격한 말다툼 끝에 그를 쓰러트린 전적이 있고, 요툰하임의 서리거인을 아스가르드에 불러들이는 소동을 벌였다. 그 이후로 오딘이 얼마나 늙고 쇠약해졌는지 토르는 알고 있기에 감옥에 갇혀 두 번 다시 아스가르드의 태양을 보지 못한 동생을 향한 의심이 멈추지 않았다.

 

 

 "프리가님이 기다리십니다." 토르는 맞이한 시종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를 왕비의 처소로 인도했다. 문이 열리고, 토르는 자신이 예상했던 광경과 조우했다.

 

 

 "로키, 역시 네 짓이냐."

 

 

 토르는 으르렁대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방안으로 성큼 발을 들였고 뻔뻔하게 프리가의 침대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로키의 멱살을 잡아챌 기세로 다가섰다. 프리가가 로키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막지 않았다면 어머니 앞에서 동생의 멱을 잡는 추태를 부렸을 터나 솔직히 상관 없었다. 어머니가 로키를 과하게 싸고 도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이번만큼은 왕비의 권한으로도 로키를 용서하지 못하는 걸 그녀는 이해할 것이다.

 

 

 "토르, 진정하렴."

 "진정이요? 제가 어떻게 진정하겠어요? 지나가는 곳마다 혼란과 파괴를 불러들인 제 동생이 아홉 세계에 분탕질을 친 걸로 부족해 아버지를 다시 잠들게 했는데요? 오, 게다가 어머니는 영원히 감옥에 갇혀있어야 할 로키를 풀어주셨고요. 진정할 수가 없죠!"

 "문제가 생겼어."

 "놀랍지도 않네요."

 

 

 토르가 빈정거렸다. 그는 사나운 눈빛으로 동생을 노려봤다. 로키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모로 돌리고 토르의 시선을 피했다. 낭패다, 라는 기색이 피곤에 지친 표정에서 드러났다. 네가 뭘 잘했다고...! 토르는 이를 악물었다.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현명한 여신은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아들의 충격이 덜 할까 고민했고, 때로는 직설적인 말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냈다.

 

 

 "로키가 임신했어."

 

 

* * *

 

 

 죄인이기 이전에 왕족인 로키의 대우는 다른 죄수들과 달랐다. 그는 독방을 사용했고, 왕비가 손수 고른 고급 가구들이 방을 채웠다. 끼니마다 로키의 입맛에 맞춘 식사를 준비했고 간식으로 싱싱한 과일바구니가 들어갔다. 읽을 책이 동날 때쯤엔 새로운 책을 구해다주며 어찌나 살뜰히 보살피는지, 왕자가 감옥이 아니라 휴양지에 보내졌다는 말까지 나왔다.

 

 

 로키의 문제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프리가의 명령으로 음식을 나르는 시녀였다. 시녀가 음식바구니를 가지고 오면 경비병이 내용물을 확인한다. 로키는 왕자의 품격을 보여주는 얌전한 죄수이고 그에게 음식을 보내는 상대가 프리가 왕비이니 로키의 탈옥을 도울 도구를 몰래 숨긴다든지 다른 수를 쓰지는 않겠지만 경비병은 매번 철저히 검문했다.

 

 

 그 날 로키가 받은 건 부드러운 롤케익과 새콤달콤한 블루베리잼, 양고기가 들어간 스프, 염소 젖으로 만든 치즈를 듬뿍 얹은 샐러드, 오렌지 주스 한 잔이었다. 여느때처럼 검문을 마치고 로키의 독방에 음식을 넣어주었다. 향긋한 음식 냄새가 퍼졌다.

 

 

 "우욱," 로키는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헛구역질을 시작하자 감옥 밖에 선 시녀와 경비병이 당황하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경비병은 이게 혹시 탈옥하기 위한 로키 왕자님의 계략이 아닐까? 하고 주춤했지만 빨리 결계를 해제하라는 시녀의 닦달에 못이겨서 감옥 문을 열었다.

 

 

 "왕자님? 속이 불편하세요?"

 "이 역겨운 냄새는 뭐야?"

 "왕자님께서 평소 좋아하시던 음식입니다. 새로운 건 없는데,"

 "당장 치워."

 

 

 로키는 코를 막고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구역감을 억눌렀다. 결국 그는 식사를 걸렀고 안절부절 못하던 시녀는 그 길로 프리가에게 달려갔다.

 

 

 "로키가!"

 "네, 입에 대지도 않으셨는데 구역질을 하셨어요."

 "치유사를 불러. 나도 갈테니 준비하거라."

 "네, 왕비님."

 

 

 로키는 겨우 한 끼 걸렀다고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머리를 쓰다듬어지고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를 토닥여주자 불만은 쏙 들어갔다. 치유사는 신중하게 로키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오랜만에 치유의 마법이 전신을 훑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 그가 꼼꼼한 진단 끝에 내린 충격적인 진단을 입밖으로 내뱉기 전까진 정말 기분이 좋았다.

 

 

 "왕자님은 서리거인이라 에시르와는 신체구조가 다릅니다. 아시지요?"

 "크게 다를 건 없잖아. 수명도 비슷한 걸."

 "제 말은, 수태기관을 말하는 겁니다. 모든 서리거인은 양성이라 임신이 가능합니다."

 "...뭐라고?"

 "우선은 축하드립니다, 왕자님. 회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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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학살의 신

MARVEL 2025. 4. 20. 20:35

*백업

 

 

친애하는, 나의 로키에게.

 

언젠가 네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나는구나. 죽음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간다, 였던가. 그 때 나는 너에게 크게 화를 냈고 네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지. 그 때 한 번 너를 잃었는데, 어리석은 나는 이번에도 너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구나. 또 다시 너를 잃었다.

 

로키, 너는 거짓말로 나를 안심시키고 가장 아름다운 잠 속으로 평화로이 빠져들었지.

 

부디 안심하고 잠들렴. 넌 단지 긴 잠에 빠졌을 뿐이야. 네가 행복한 꿈을 꾸길 바란다. 아픔도 슬픔도 없는 곳에서 포근히 잠들거라. 그리고 눈을 뜨는 날엔 봄이 올거야. 긴 겨울이 지나 따스한 계절이 찾아올거고 맹세하건대, 두 번 다시 겨울이 너를 외롭게 만들 수 없을거다. 

 

태양이 다시 우리를 비추는 날, 다시 만나자꾸나.

 

 

*  *  *

 


토르가 지구로 돌아온 건 2020년의 겨울, 타노스의 목을 벤 그가 지구를 떠난 지 정확히 1년 째 되는 날이었다. 그 날은 하루종일 꾸덕한 눈구름이 가득 낀 우울한 날이었다. 사람들은 코트 옷깃을 여미고 하늘을 쳐다보며 오늘은 첫 눈이 내릴거라 예상했다. 아이들에게는 기대를, 어른들에게는 걱정 반 설렘 반을 안겨주는 첫눈. 겨울이 없는 축복받은 땅에서 온 아스가르드의 국민들에게는 생애 두 번째 첫 눈이었다

 

그 날, 첫눈을 기다리던 뉴 아스가르드에 커다란 번개가 쳤다. 희뿌연 구름을 몰아내고 나타난 먹구름 한 가운데에서 일직선으로 내리친 번개는 대지를 검게 불태웠다. 번쩍이는 빛에 눈이 멀 것 같았던 것도 잠시, 빛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상징이나 다름없는 붉은 망토가 등 뒤에서 휘날렸다. 갈무리하지 못한 번개를 전신으로 피워내는 경이롭고 장엄한 신의 강림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한 쪽 무릎을 꿇어 바닥에 댄 채로 몸을 숙였다. 토르 오딘슨이 돌아왔다. 왕좌를 비우고 떠났던 그가 마침내 돌아왔다. 그는 떠나야하는 이유를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으나 돌아온 토르의 품에 안긴 시체 한 구를 보고 사람들은 이해했다. 시체는 붉은 색과 대조되는 녹색의 망토에 휘감겨있었다.

 


로키의 장례식은 치뤄지지 않았다. 토르는 자신의 작고 비좁은 오두막에 로키를 눕히고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을 오래도록 정돈해주었다. 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가슴 위에 올리고 이마에 입맞춤을 하는 왕의 모습은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듯 경건했지만 발키리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로키는 죽지 않았으니 그가 깨어날 때까지 누구도 이 오두막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명을 내리는 토르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광기 앞에서 반론은 무의미했다.

 

토르는 타노스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타노스는 이미 죽었어요. 폐하의 손으로 목을 쳤잖아요." 간신히 욕을 참은 발키리가 말했다. 이제야 왕이 귀환했다. 해결해야할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닌데 허튼 소리나 지껄이는 왕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니, 타노스를 죽일거야. 살아있는 모든 타노스를." 토르는 고저없이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존재하는 모든 감정이 불살라져 잿더미만 남은 것 같기도 했다. "모든 시간선의 타노스를 전부."

 

그는 로키가 타노스와 그의 사이를 갈라놓던 순간을 기억했다. 토르의 앞을 가리고 나서서 그를 대신하여 죽던 그 때. 목이 비틀려 죽는 모습이 계속 다시 눈앞에 보인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다.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면 그의 뇌는 같은 장면을 재생하기 시작한다. 몇 백번이나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토르는 다짐했다. 타노스를 죽일 것이다. 이 악몽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것이 살아남은 나의 책무이다.

 

토르가 모든 시간선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타노스를 죽이겠다는 복수 일념으로 시작한 일이었으나, 자신의 세계를 침범당한 사람들은 그를 적으로 여기고 공격했다. 토르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시점에서건 타노스를 내버려둔다면 그는 반드시 전 우주의 절반을 지우겠답시고 같은 재앙을 반복할 것이다. 토르의 행위에는 정당성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이 최악의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 천둥신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거스르는 세계에 합당한 벌을 내렸다. 그가 쓸고 간 자리에는 불타는 대지와 죽음, 폐허만 남았다. 

 

빠르게, 하지만 확실하게.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갔다. 수 일, 수 개월, 수 년의 시간동안 여행을 하며 타노스를 죽이고, 우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그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생겼고 어느덧 그에겐 막강한 군단이 생겼다. 전 우주를 공포로 물들인 사상 최악의 빌런, 더 이상 토르는 영웅이 아니었다.

 

토르의 군단에 대응하기 위해 우주 각지의 영웅들이 모였다. 그들의 비상대책센터는 뉴 아스가르드에 마련되었다. 토르의 번개는 지구 곳곳을 파괴했지만 여기, 뉴 아스가르드에는 번개가 치지 않았다. 이곳은 토르 오딘슨의 번개가 결코 해치지 않는 곳이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이어졌다. 그들 중 다수가 토르를 알았다. 아홉 세계의 수호자이자 친절하고 다정한 천둥의 신. 누군가에겐 구원자였고 누군가에겐 친구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한다. 그들이 알았던 토르 오딘슨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의견은 좀처럼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 정면으로 부딪혀서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만다. 옛 친구들이라 해도 토르는 자신의 과업을 막는 자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설득이 가능하다면...누군가의 근심에 잠긴 목소리는 있을 수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설득이 가능한 사람, 딱 하나 있기는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발키리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누군데?" "Sleeping Beauty." 정확히는 잠든 오두막의 왕자님이었다. 썩지 않는 시체의 로키 오딘슨, 어쩌면 토르의 말대로 그는 죽은 게 아니라 잠이 든 게 맞을 수 있다. 수 년 간 미동 없이 잠들어 있는 그가 타이밍 좋게 눈을 뜰 리 없지만, 발키리는 그 있을 수 없는 희박한 가능성에 매달리는 게 가장 승산이 높다는 걸 알았다. 극적인 연출을 좋아하는 로키 오딘슨. '너희들의 구원자가 왔노라!' 안개를 가르고 등장하여 몰살 직전의 아스가르드 백성들을 구했던 그 때처럼, 한 번 더 기적이 일어난다면 좋을텐데. 그야말로 극적인 타이밍이 아닌가. 자신이 눈 뜬 세상에 어떠한 위협이 없길 바랐지만 결국 가장 큰 위협이 되어버린 형을 구원하기 위한 최적의 순간.

 

"로키, 그라면 토르를 막을 수 있지만,"

"내가 뭐?"

 

쿠당탕, 벌떡 일어서는 기세에 발키리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녀는 눈을 부릅 떴다. 그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한 방향으로 향했다. 오 마이 갓! 누군가는 신을 찾는 비명을 질렀다.  


"도움이 절실해보이네?" 거짓말처럼 로키 오딘슨이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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